오늘은 사사기 마지막 사사 삼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쩌면 황당한 서원을 했던 입다보다, 삼손은 더 당황스러운 사사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이야기가 기드온이나 입다보다 더 길게 4장에 걸쳐 기록한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주실 메시지가 많으시다는 뜻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까지 삼손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삼손의 시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신앙에 대해서입니다.
안 봐도 다 짐작이 되시죠?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1) 이스라엘은 무려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가 36년이었죠.
그동안 일본이 별 짓 다했잖아요?
성도 바꾸게 하고 일본말 쓰게 하고 일본 신 섬기게 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벌레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최하층민이었습니다.
지난 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종전을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내놓은 조건을 읽고 마음이 씁쓸하더군요.
분쟁 중인 영토를 러시아에게 넘기고,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고, 군사력을 감축하고, 중대한 무기들을 없애라는 조건입니다.
그렇게 하면 러시아와의 종전을 중재하고, 앞으로 무력 충돌이 있을 시 유럽과 미국이 관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이게 납득 될 조건인가요?
세상에서 약소국들이 강대국들에게 늘 이런 식으로 당하죠.
블레셋 나라를 40년간 섬긴 이스라엘은 남은 게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환난의 시작을 성경은 1절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서로에게 악을 행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인생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장한 사람들의 속불행을 내시경을 통해 보여주는 게 사사기입니다.
2) 우리가 살펴 온 사사기 특징으로 보면 이제 이스라엘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고난을 만나면 사람들이 처음엔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돌이키지 못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가기가 더 힘들죠.
나중엔 악으로 버티면서 끝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블레셋을 섬기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40년이 지나도록 회개는커녕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40년 세월이면 40세 이하는 전부 다 태어날 때부터 블레셋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보니 노비인 것이죠.
블레셋 손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 보면 삼손이 결혼 문제로 블레셋 사람들과 엮여 그들에게 보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덤비지 못하고 유다지파를 위협합니다.
그때 유다지파 사람들 삼천 명이 떼를 지어 삼손을 찾아 옵니다.
이제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과 싸웠다고 해야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와서 하는 말이 기가막힙니다.
14장11절, 유다 사람 삼천 명이...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를 준비하셨지만, 정작 본인들은 구원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겠다고 나오는 사람은 없잖아요?
아무도 구원을 원하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삼손이 등장해 뭔가 바뀌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블레셋의 문화와 신들 밑에서 숨죽이고 사는 데 길들여진 것이죠.
성도들이 세속에 묻혀 신앙과 육신의 갈등이 없어진 상태일 것입니다.
성도들은 매일 믿음과 육신의 갈등 속에서 살아야 정상입니다.
이런 꼴을 당하면서 삼손이 민족을 구원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동안 사사들이 일어나면 그래도 사람들이 도왔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삼손을 돕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정말 삼손 혼자, 단독으로 블레셋과 싸웁니다.
왜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괴력을 주셨는지 이제 이해가 되시죠?
삼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16장에 나옵니다.
삼손이 블레셋 성읍에서 1톤은 족히 될 성문 짝을 떼서 메고 거의 60킬로를 가서 헤브론 산에다 그 문짝을 세웁니다.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삼손에게 괴물 같은 힘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런 힘이라도 없다면 삼손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되겠습니까?
혼자 싸워야 하는데요.
우리가 인생의 짐을 혼자 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내 짐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하나님은 반드시 짊어질 힘을 주십니다.
입다를 비운의 사사라고 한다면 삼손은 고독한 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손이 우스꽝스럽게 힘자랑만 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 삼손을 뜯어보면 왜 그렇게 살았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삼손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의 개인적 원한 때문에 블레셋을 무찌릅니다.
동족들이 이렇게 구원을 원치도 않으니 나서고 싶지도 않았겠죠.
3) 성경의 역사 속에 이렇게 길고 어두운 사사시대가 왜 자리잡고 있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죠.
사사기를 읽다 더 과거인 모세와 여호수아시대만 생각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잖아요?
그때도 만만찮게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사사시대에 비하면야 큰 믿음의 시대죠.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순종하는 게 얼마나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버린 사사시대 사람들을 통해서 그걸 거꾸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사사시대 350년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역사 중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대해 임의로 그 시간을 줄이지도 늘리지도 않으시는 게 원칙이십니다.
하나님의 경영을 엿장수 맘대로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새상 지도자도 그렇게 하면 지탄을 받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세속사의 흐름을 타고 구속사를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셔야 될지 맞추셔서 보내신 것이죠.
예수님의 대속을 이루시고,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기 가장 최적의 시간에 오신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통일한 것, 그래서 헬라어가 공용어가 된 것,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발달한 도로망.
그런 것들이 세속사에서 준비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뿐아니라 세계 역사와도 맞추셔서 구속시계를 돌리십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반역과 멸망을 스스로 선택했다지만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이 오시기까지 보존하시는 것이죠.
이걸 우리 인생에서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걸 오해하면 하나님께 마구잡이로 기적을 조르다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재정이 악화되고 빚을 졌으면 일해서 갚아가야 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데 힘든 감정노동을 거쳐야 합니다.
몸의 질환들은 수술하고 약 먹고 낫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살기 편하라고 울기만 하면 젖병을 물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는 우리 곁에 항상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만 믿어도 우리는 뭐든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삼손의 출생이 다른 사사들에 비해 좀 특이합니다.
2절에 보면 삼손의 가문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라는 사람입니다.
단 지파는 남쪽으로 유다지파, 북쪽으로 에브라임지파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블레셋과 가까워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3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불임인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라는 할때는 보통 세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 천사, 성육신 전의 성자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는 끝까지 내용을 따라가 보면 이분이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노아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하시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의 명칭 중 하나입니다.
천사가 그렇게 멋있는 척하면 짤립니다.
특히 이사야서9장에서 메시야의 탄생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마노아가 2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하잖아요?
성경에서 출생이 예고되고, 임신이 불가능한 태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이삭, 세례요한, 예수님이 그런 경우죠.
훌륭하지도 않은 삼손이 왜 이런 특이한 출생을 통해 와야 하냐는 의문이 들죠.
평범하게 태어난 아이라도 사사를 만드실 수 있잖아요?
이것은 구원자 삼손의 출생을 통해서 메시야의 예표를 심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결국 예수님으로 풀립니다.
하나님은 임신이 불가능한 태를 통해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수한 출생을 암시하는 준비와 같은 것입니다.
삼손을 살펴보면 그의 삶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예수님의 예표가 너무 많이 들어있습니다.
성경 예표의 인물들의 긍정적인 부분으로만 예수님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부정적인 부분, 온전하지 못한 것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예표를 보여줍니다.
삼손이 자기 민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블레셋과 싸워 구원하는 것도 그렇죠.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았고 혼자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유다지파가 삼손을 결박해 블레셋에 넘겨준 것도 예수님을 결박해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에 복선 같은 것입니다.
가장 엉뚱한 사사 삼손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많은 예표가 담겨있다는 게 참 역설인 것 같습니다.
뒤에도 계속 나옵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실수와 부족함과 단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살 수 있습니다.
삼손이 완전한 구원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처럼 삶을 통해 예수님을 가리키며 사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삼손이 굳이 나실인이 되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굳이 삼손이 나실인일 이유를 찾기 힘들죠.
5절,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임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세속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어느 사사도 나실인은 아니었습니다.
희한하게 마지막 사사에게 나실인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주신 것이죠.
아마도 이젠 나실인으로 구별되지 않으면 그 시대에 사사직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실인의 원어는 ‘나지르’입니다.
‘거룩하게 되다, 분리되다’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나지르가 좀 특별하게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대제사장의 복장을 보면 머리에 세마포 관을 쓰죠.
그 관 위 금으로 된 성패를 붙이는 데 이 성패라고 번역한 원문 히브리 단어가 나지르입니다.
대제사장에게 나지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죠.
또 시편21편3절에도 나지르가 나옵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여기서 관이 나지르입니다.
그러니까 나지르를 대제사장, 왕에게 사용한 것이죠.
삼손이 나실인 사사이고 구원자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태에서부터 구원자로 구별되셨고, 우리의 죄를 위한 대제사장이시고, 우리의 왕이십니다.
3. 본문은 전체에서 삼손의 부모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삼손의 모친에게 특별한 당부를 합니다.
4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엔 나실인 삼손에게 그걸 가르쳐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마치 삼손의 어머니가 나실인인 것처럼, 술과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나중에 마노아가 다시 여호와의 사자에게 아들을 낳으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묻지만 삼손에 대해서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신 삼손이 지켜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고 하시죠.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정 기간 헌신하는 나실인의 서약을 하는 경우에 율법에는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 전체를 관장하는 것은 머리죠.
그 머리를 덮은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권위가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손이 할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 머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면 나머지는 다 따라갑니다.
그러나 삼손의 어머니는 마치 본인이 나실인인 듯 나실인에게 금지된 것을 지켜야 했던 것이죠.
이것은 삼손의 양육을 책임져야 할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믿음을 전수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잖아요?
물론 삼손의 부모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지식이 다소간이라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실인이 뭐예요?’ 그러지 않잖아요.
번제와 소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죠.
마노아가 아내의 잉태 소식을 듣고 즉시 기도합니다.
기도 안 했던 사람이었다면 그러지 못합니다.
아들을 어떤 규례로 키워야 할 것인지 다시 오셔서 가르쳐 달라고 하죠.
신자들이 내 자식을 어떻게 믿음으로 키워야할지 기도합니까?
본문을 잘 읽어보면 이런 마노아의 태도에서 벌써 부성이 느껴집니다.
개그맨 최홍0씨가 참 불우하게 살았더군요.
전에 아이컨택이라는 프로에서 어릴 때 자기를 심하게 구타했던 형을 만나는 게 나왔었죠.
최홍0씨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가 아이를 지우려고 음독을 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 만에 깨어났는 데 아기도 살아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최홍0씨가 초등학교에 가도록 말을 못하고 어버버만 했다고 합니다.
다섯 살 정도 되던 때 그 당시 대머리총각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 노래를 어버버로 따라하는 걸 보고 아버지가 ‘우리 아들 가수해도 되겠네’ 그러면서 그렇게 기뻐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부모에게 삼손을 맡기신 것입니다.
부모가 좋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자식에게 큰 기업이고 희망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다른 것은 물려주지 못한다 해도 자식들 믿음에 좋은 영향력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블레셋여인과 결혼하려는 것을 반대합니다.
아들이 나실인으로 살도록 이끌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그러나 삼손은 부모의 믿음만큼도 못 따라갑니다.
나고 자란 사회와 문화가 그만큼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온 마을이 키운다고 하잖아요?
중세시대 천 년 동안 사람들이 다 망한 신앙을 따랐습니다.
개신교로 종교개혁을 이룬 마틴루터도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금욕수행을 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마틴루터를 ‘유령의 숲에서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녀가 있다고 믿었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숨어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루터도 이웃 여인이 마녀로 화형당할 때 그게 맞다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교황은 성베드로성당을 짓다 돈이 부족하자 면죄부를 판매했잖아요?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서 벌받을 사람이 천국으로 간다 사기를 친 것입니다.
근친상간은 금화 다섯 냥, 낙태는 금화 여섯 냥, 그런 식으로 면죄부 가격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성당 건축비가 현 시세로 환산하면 40조였다고 합니다.
성베드로성당이 면죄부 팔아서 지은 건축물입니다.
루터는 카톨릭신앙이 성경을 벗어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면죄부까지 주며 교회가 돈벌이하는 걸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 받는다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며 개신교로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루터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비성경적인 천주교 교리들을 완벽히 걸러내지는 못한 반박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신앙을 되찾은 현대에, 마음껏 예배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삼손은 사사시대의 아들이고 부모 세대보다 더 하나님께로 멀어진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 믿음이 더 희귀해질 것은 통계가 말해줍니다.
23년도 통계를 보면 19세에서 29세까지 기독교인은 9%에 불과합니다.
열 명 중 1명만 교회 다닌다는 것이죠.
우리 자식들이 어디서 믿음이 생기겠지 방치하지 마시고 신경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와 여인의 대화를 원문으로 보면 좀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우리 말 번역에선 빠졌지만 원문에는 여호와의 사자께서 여인에게 말할 때 ‘청하노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주님께서 삼손 어머니를 왠지 인자하게 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삼손 이야기의 결말도 알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을 잃게 되잖아요?
아들을 낳았을 때의 그 기쁨과 아들을 잃었을 때의 그 슬픔을 주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똑같은 비통을 느낄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안쓰러움으로 여인을 대하신 것 같습니다.
삼손보다 더 그의 어머니가 나실인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고난까지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더 강인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안창호선생님의 모친인 조마리아여사가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혹여라도 어머니의 슬픔을 생각해 안의사의 마음이 약해질까 봐 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던 모정인 것이죠.
사사시대 흔치 않은 믿음의 부모 밑에 태어난 삼손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랍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사시대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게 되었죠.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구원자 삼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처럼 때가 차매, 구원을 바라지도 않은 나같은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준비하시고 구원자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어둠을 통해서 우리는 배웁니다.
우리 믿음은 한 두 번 뒤로 물리다 보면 다시 제자리로 오는 게 몇 배는 힘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결국 못 돌아오는 것입니다.
삼손의 어머니가 나실인 같이 살아야 아들을 교육하고 아들의 고난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야 자녀들과 내게 기댄 영혼들을 믿음으로 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깨닫고 세상에서 나실인 믿음으로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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