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사시대 마지막 사사 삼손의 결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삼손의 죽음과 함께 블레셋의 지도부를 완전히 전멸시켰지만 뭔가 석연찮죠.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이겼지만 왠지 잘 못 싸운 것’ 같잖아요?
그러나 오늘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본문은 아마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치정, 돈, 배신, 복수, 그런 드라마틱한 주제들이 다 들어 있잖아요?
오늘 본문이 그렇듯이 삼손이 블레셋과 싸운 동기들은 다 개인사입니다.
그리고 세 명의 여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삼손이 결혼식을 올렸던 블레셋 여인입니다.
결혼식에서 블레셋 아내의 동네 사람들과 삼손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게 도화선이 되어서 삼손이 동네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동네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 질러 죽입니다.
사사시대는 법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법이 멀면 무력만 통하죠.
격분한 삼손이 당연히 그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대가 삼손을 잡으러 오고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레셋을 크게 제압했지만, 결혼은 비극으로 끝난 것이죠.
두 번째 여인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블레셋 가사에 있는 매춘부입니다.
나실인이 매춘부에게 드나들었다는 것이죠.
이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성문에 매복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성문짝을 떼어서 메고 60킬로 떨어진 이스라엘 땅 헤브론에 올라가 거기다 세웁니다.
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합니다.
성문짝을 뺏겼다는 건 블레셋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죠.
삼손의 무서운 괴력에 눌려 이제 이스라엘에게 맘대로 무력행사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여인이 본문에 나오는 들릴라입니다.
소렉골짜기에 살았다고 나오지만 어느 민족인지는 정확치는 않습니다.
들릴라와는 정식 혼인을 하지 않고 동거 중이었습니다.
이런 삼손의 여자 문제를 두고 여자 편력이 심한 난봉꾼처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법한 사사시대를 생각하면 유독 삼손만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뒤에 보면 제사장이 첩을 거느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우리가 삼손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성경이 보여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삼손을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죠.
실망스러운 삼손의 생애는 악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이고 약함의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공감이 되고 우리 믿음에 적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겠죠.
그냥 개망나니다 그러면 더 이상 뭘 살펴보겠습니까?
2. 그런 관점에서 오늘 삼손의 결말을 다시 들여다 보겠습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해서 소렉골짜기를 드나든다는 소문이 블레셋에 알려졌습니다.
아까 삼손의 두 번째 여자가 가사에 있는 매춘부였다고 했죠.
가사는 블레셋의 중심도시입니다.
이전에 블레셋 군대를 몰살시키고도 삼손이 자유자재로 블레셋 땅을 드나들었다는 것이죠.
삼손의 초인적인 힘을 블레셋이 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은 이참에 들릴라를 이용해 삼손을 잡아 보려고 합니다.
5절에 보면 블레셋의 방백들이 여인에게 올라가서 엄청난 제안을 합니다.
만일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내 주면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이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겠다고 하죠.
다 합치면 오천오백 개의 은을 주겠다는 것이죠.
어느 정도의 돈인지 가늠이 잘 안되죠.
대략 오십 년 치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십 억 제안을 거절할 만큼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을까요?
들릴라는 그 돈에 삼손을 팔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은 사람의 존엄한 가치들을 깔보고 비웃죠.
지난 주 삼손이 자기 민족들 손에 블레셋에 넘겨졌던 걸 생각하면 여인에게도 버림받은 인간 삼손에게서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삼손은 대체 왜 이렇게 살았을까를 제가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삼손은 태중에서부터 민족의 구원자로 소명을 받았잖아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던 부모들은 삼손을 믿음으로 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마다 초인적인 능력 발휘했죠.
삼손은 자기가 어떤 사사가 될 걸 기대했을까요?
사사라면 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군사들이 모이고, 기드온이나 입다처럼 왕 같은 지위를 얻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삼손에겐 그런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도, 민족도, 삼손을 원치 않았습니다.
사명과 힘은 있는데, 나라를 위해 힘을 떨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죠.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능력과 재주는 있지만 그걸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죠.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잖아요?
지난 주 한국은행에서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을 높여 잡았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국내 주식 수익률 성장은 전세계 압도적 1등이라고 합니다.
금값도 오르고 주택가격도 올라 국민들 자산가치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이익은 고소득층에 집중되고, 고용시장에서는 청년 고용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K자 성장이라고 합니다.
한쪽은 계속 올라가고 한쪽은 계속 내려가는 것이죠.
요즘 평범한 직장인도 밥값을 아끼려고 컵밥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회가 될까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기회를 잡지 못한 삼손을 보면 사사보다는 건달에 가깝게 보이죠.
삼손의 활약상 전부가 여자에게 드나들고, 여자 무릎 베고 누워 자다 생기는 일입니다.
본문 들릴라의 집에서도 삼손이 잠든 게 네 번이나 나옵니다.
왜 그렇게 삼손은 깊은 잠에 빠졌을까요?
사사로서의 자기 삶에 대한 깊은 실망 때문이 아닐까요?
삼손도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달라질 희망이 없으니 좌절과 절망감이 삼손을 사로잡은 것이겠죠.
사람이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고, 능력껏 할 일이 없고, 낙담한 상태가 되면 자꾸 잡니다.
삼손은 정상적인 잠이 아닙니다.
머리털을 베틀에다 걸어서 짜는 데도 잠을 자잖아요?
물론 들릴라가 종종 머리털을 만져주고 빗겨주고 그랬겠죠.
삼손과 같은 비정상적인 잠이 성경에서 몇 번 나옵니다.
광야의 한 뼘 로뎀나무 그늘에서 죽은 듯 자고 있던 탈진한 엘리야가 있죠.
엘리야는 천사가 주는 떡과 물을 먹고 또 잡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던 요나가 폭풍 중에 그렇게 잠들었습니다.
갑판에서는 짐들을 다 바다에 내 던질 정도로 배가 날뛰는데 혼자만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죠.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갈등과 번민에 지치면 그렇게 죽은 듯이 잠들기도 합니다.
이성과 습관적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런 도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문제까지 피하지는 못하죠.
사랑은 하지만 그렇다고 삼손의 꿈과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저는 삼손이 실패한 첫 번째 이유를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실인이 머리를 기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의 의미잖아요?
사사로서 어떤 삶을 살지는 삼손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삼손은 아무도 구원을 원치 않는 그런 사사시대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범접 못할 힘을 주신 것이잖아요?
우리를 부르심도 지금의 환경과 건강, 또 지금의 나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 대신 믿음을 주신 것이잖아요?
삼손처럼 내가 원하는 그림만을 그린다면 삼손처럼 실망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다윗이 자기 인생에서 왕의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는 사실 모르는 일입니다.
요즘 오디션프로를 하던데, 그걸 보면 간절하다고, 노력한다고 다 원하는 걸 이루는 게 아니잖아요?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는 다 작은 일을 하면서 삽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작은 일입니다.
작은 일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감당하려면 그것을 능가하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작은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작은 일을 하며 산다고 내 능력이 헛되이 낭비 된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손이 그래서 인생을 망친 것입니다.
삼손은 존재 자체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것입니다.
삼손 덕택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폭정에서 숨을 돌리며 살고 있잖아요?
15장20절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본문31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오죠.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두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다는 것은 삼손의 생애가 사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못 박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큰 일을 못 한다 해도 존재만으로도 어두운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뻐하십니다.
더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내 주변에 예수님을 떠오르게 하는 것만도 중요한 사명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그 분들이 우리 형님이 장로라거나, 누가 권사라거나, 친척이 목사라거나 꼭 그런 말을 하더군요.
가족들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말이죠.
삼손의 긴 머리도 그랬을 것입니다.
다들 하나님을 기억 속에 잊어버려 갈 때 삼손의 긴 머리카락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죠.
삼손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나실인이래, 나실인이래’ 수근댔을 것입니다.
나실인 같이 살지도 못하고, 사사 대접도 못 받는 삼손에게 그 머리카락은 잘라 버리고 싶은 무거운 짐 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 머리털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것은 삼손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떻든,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심을 믿고 따르시길 축원드립니다.
3. 오늘 삼손은 자기 힘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누설하며 스스로 파멸합니다.
들릴라가 얼마나 집요하게 다그쳤는지 16절을 보면 압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삼손은 자기 힘의 비밀을 묻는 들릴라에게 세 번 거짓말을 합니다.
먼저 마르지 않은 새 활줄로 묶으면 자기가 힘을 못 쓴다고 말합니다.
들릴라는 그 말대로 삼손을 묶고 매복시켰던 블레셋 군사들을 부릅니다.
삼손은 몸에 묶인 줄을 불에 탄 실처럼 끊어 버립니다.
정상이라면 삼손이 들릴라에게 불같이 화를 내도 모자랄 일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에게 거짓말했다고 들릴라가 댑서 화를 냅니다.
그런 들릴라에게 쩔쩔매며 난처해 하는 삼손이 느껴지죠.
사랑에 단단히 눈이 먼 것입니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확인 된 사실입니다.
영국의 한 대학교수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를 촬영해서 연구했더니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두뇌 활동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사랑에 빠졌다면 상대와 상황을 더 비판적으로 보는 게 필요한 것이죠.
욕심이 나고 조바심이 나는 일일수록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야 합니다.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될 일은 다 되더군요.
삼손을 보면 사랑의 포로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들릴라의 닦달에 삼손은 두 번째, 세 번째도 대충 둘러댑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사랑을 미끼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죠.
비밀을 숨기는 걸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인즉슨 나도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협박이죠.
삼손이 들릴라의 속셈을 몰랐겠습니까?
그럴 정도의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삼손이 자기 힘의 비밀을 여인에게 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들릴라의 사랑을 잃을 게 두려웠다는 것이죠.
사실 본문 어디에도 들릴라가 본래 삼손을 사랑했단 말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각자 자기를 사랑할 뿐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잖아요?
삼손은 머리털의 비밀을 말했지만 설마 들릴라가 그럴까, 설마 머리털에 힘이 있을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머리가 다 깎인 것을 알고도 이전처럼 힘을 떨치겠다고 하잖아요?
20절,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이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의 실패의 두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 대신 들릴라의 사랑을 자기 머리 위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위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내 위에 계시고 그 다음은 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자식도, 돈도, 목표도, 나보다 더 위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타인을 사랑하는 기준을 정해 주셨잖아요?
‘네 몸을 사랑하듯이’ 그 정도면 됩니다.
평등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 이상이 되면 삼손처럼 노예가 됩니다.
사람은 섬길수록 무시하잖아요?
우리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섬길수록 더 존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삼손의 몰락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은 결국은 나를 파멸의 벼랑으로 밀치고 유유히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기 보다는 그게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의 생태입니다.
우리가 어떤 우상을 내 머리 위에 둘 때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십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떠나셨잖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내가 섬기는 다른 우상과 함께 거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릴 버리신다는 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남과 충만하신 임재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사도 역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결국 삼손은 들릴라에게 굴복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내 마음을 뺏는 것은 결국 나를 포로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께 눈멀게 만들잖아요?
삼손은 힘을 잃고 원수에게 붙잡혀 눈을 뽑히고 가사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귀가 돌리는 연자 맷돌을 짐승처럼 돌리게 된 것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것은 삼손에게 다시 힘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블레셋사람들도 보았잖아요?
삼손의 힘이 돌아온다는 걸 느꼈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온다면 대체 몇센티가 되어야 힘을 쓸 수 있나요?
삼손은 보통사람들보다 탁월하게 피지컬이 좋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기둥을 양손으로 낄 정도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1톤짜리 성문짝을 지고 60킬로를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인 것도 정상적인 삼손의 힘이 아닙니다.
앞에서 삼손이 사자를 만나 찢어 죽일 때 분명히 그 원인을 알리십니다
사사기14장6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힘은 초인적인 힘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혜라도 하나님의 지혜에는 차별성이 있고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점점 알아가게 되면 왜 예수님께서 성령을 구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다는 것은 삼손이 여전히 나실인이라는 걸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나실인 삼손이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영원히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삼손의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13장7절하,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삼손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의 축제일이 돌아왔습니다.
다곤 신전엔 블레셋의 방백들과 유력자들이 모여 삼손을 무너뜨린 것을 자축합니다.
삼손을 자기들에게 넘겨준 다곤신을 찬양합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사람들이 삼손을 데려오라고 소리칩니다.
두 눈이 멀고 힘이 빠진 삼손을 보며 조롱하겠다는 것이죠.
삼손은 소년의 손에 이끌려 취기에 떠들썩한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이때 삼손은 이 순간이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궤멸시킬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8절,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에 하옵소서 하고
기도는 삼손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삼손의 믿음의 고백은 아주 분명하고 절실하죠.
이것은 삼손의 회개가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회개는 믿음의 일면이지만 회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성도들의 구원의 근거도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삼손은 기도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삼천 명이 올라간 지붕을 지탱하는 육중한 두 기둥을 양팔에 껴안고 무너뜨립니다.
30절,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그 다음을 보십시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 말씀이 묘한 복선을 깔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이 중첩되죠.
기록자는 모르고 성령의 감동으로 사실만을 기록했지만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단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삼손의 마지막이 회개하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면 그래도 사사다운 종말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삼손을 억지로 그런 믿음의 영웅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갑자기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국 최후에 생각하는 것은 나일 뿐이지, 하나님도 이웃도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다만, 그런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삼손의 결말에서 이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이렇게 쓰시려고 태에서부터 정하신 것일까요?
만일 삼손이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도록 몰아가지 않으셨겠죠.
그것이 억울함을 풀려는 삼손의 소원이었고, 그로써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한 일이기에 힘을 주신 것입니다.
힘을 잃고 눈이 뽑힌 것도, 블레셋과 함께 죽는 것도 삼손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끝까지 나실인으로서 살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삼손은 존재만으로도 오래 오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삼손의 연약함과 시대적 어려움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사시대의 끝, 더 짙은 암흑의 시간에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하던 그 시대에도 사무엘 같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를 어떤 환경에서 부르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시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반드시 후회 없고 만족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삼손은 어두운 시대, 연약함 중에 한줄기 믿음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죄인들을 위해 계속 또 다른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같은 사사시대 베들레헴에서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룻과 보아스를 통해 다윗의 가문이 만들어집니다.
모든 불완전한 구원자와 왕이 아닌 가장 완전한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것이죠.
이상으로 사사기를 마치며 그 시대를 구원했던 사사들은 우리 주예수님의 구원을 멀리서 비추고 있다는 걸 잘 이해하셨기를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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