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입다의 서원 (사사기 11장)

남수연 2025. 11. 12. 23:16

오늘의 사사는 입다입니다.

사사기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 같습니다.

이게 맞다는 거야, 틀리다는 거야?’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 중에 입다의 서원이 들어갈 것입니다.

입다가 전쟁을 앞두고 서원을 하죠.

이기게 해주시면 처음 내 집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그런데 무남독녀 외동딸이 제일 먼저 입다를 맞이합니다.

입다는 옷을 찢고 주저앉죠.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기 위해 딸을 바칩니다.

입다는 왜 이런 서원을 했을까요?

이런 서원도 지켜야 할까요?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처럼 막지 않으셨을까요?

입다의 서원은 참 미스터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입다 만큼 인간에게 놓여진 고통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사가 없습니다.

오늘 입다를 통해서도 복된 말씀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게 된 때 배경에 대해서입니다.

1) 당시 이스라엘은 전국적으로 외세에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10장에 보면 이런 기가 찬 말씀이 나옵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일곱 나라의 신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은 버리고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절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일곱 개도 훨씬 넘는 세상우상을 섬겼을 사람들입니다.

성공과 돈과 쾌락과 명예를 최고로 알고 따르는 세상사람들과 우리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은혜이고 기적이죠.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요단강 동쪽 지파들은 암몬족속에게, 서쪽 지파들은 블레셋에게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조폭들이 찾아와 때리고, 부수고, 갈취해 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18년을 시달리다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사기 사이클이라면 그다음 무엇이 나올 순서입니까?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주셔야죠.

그런데 앞에 10장을 보면 이번엔 하나님이 즉시 사사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이제 더 이상은 나도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큰 소리를 쳐도 사실 위기 때 도와 줄 대책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신자들이 위기 때만 하나님을 이용한다 해도 늘 속아 주시잖아요?

미국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 교회에 의류업을 크게 하는 부부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얼마나 요란하게 꾸미고 다니는지 누가 봐도 패션계 종사자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아내 집사님의 옷차림이 수수해지더니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합니다.

남편 집사님이 암에 걸렸던 것입니다.

암 수술을 하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남편 집사님도 새벽기도를 나왔습니다.

두 사람의 달라진 모습에 모두가 하나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시 두 사람의 옷차림이 요란해 지기 시작합니다.

주일예배에 간간이 빠지더니 결국 교회에서 보기가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사사시대 같은 신앙이 반복되는 건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낙심할 때가 있고, 좀 더디 갈 때가 있더라도 등을 돌리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이 즉시 사사를 보내주시지 않자 이스라엘사람들도 더 몸을 낮춥니다.

10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여기서 근심했다는 단어는 견딜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학대 당하는 걸 보자니 하나님 마음이 그만큼 힘드셨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식 때문에 종종 그런 근심을 하게 되죠.

결국 하나님은 입다를 사사로 보내주십니다.

 

2) 입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입니다.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은 지명이지만 입다의 아버지 이름도 길르앗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엔 지명이 이름이 되기도 하고, 이름이 지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기생은 직업적인 매춘여성을 말합니다.

당시 첩의 자식들은 어느 정도 자식으로 인정 받았지만 매춘으로 얻은 자식은 경우가 다릅니다.

본처의 자식들이 성장하자 출신이 창피하다고 입다를 내쫒아 버립니다.

입다는 길르앗땅에서 쫒겨나 동북쪽에 있는 이방 족속의 땅 돕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1절에서 입다는 큰 용사라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기백 있는 장군감인 것이죠.

기질이 그러다 보면 그쪽으로 빠지게 되어 있잖아요?

입다 주변엔 사연있는 이사람 저사람이 모여들어 군대 같은 조직을 갖게 된 것입니다.

 

3) 이때 암몬부족들이 요단 동쪽 땅을 내놓으라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우선 오늘 전쟁터가 된 이 땅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합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 요단강 동쪽 편에서 마지막 전쟁을 치릅니다.

이스라엘의 진군을 막으려 무장하고 나온 아모리족속과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을 격파하고 요단 동편 비옥한 땅을 차지합니다.

그중 가운데 위치한 땅이 길르앗입니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니었지만 땅이 워낙 좋잖아요?

이 땅을 욕심내는 지파가 있었죠.

르우벤, , 므낫세 절반이 모세에게 요청해 이 땅을 분배받습니다.

므낫세 동쪽 지파의 땅 중에 길르앗 일부가 들어갑니다.

오늘 길르앗 사람들은 므낫세지파인 것이죠.

지난 주 살펴 본 기드온은 서쪽 므낫세지파 사람이었고 입다는 동쪽 므낫세지파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두 지파로 쪼개져 힘이 분산되니 외세 침략에 취약했던 것이죠.

나뉘지 말고 힘을 합쳐야 강해진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마귀는 자꾸 틈을 벌리고 갈라지게 합니다.

그런데 길르앗은 아모리족하고 싸워서 뺏은 땅이잖아요?

그런데 왜 암몬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걸까요?

이유가 없는 건 아닙니다.

길르앗이 본래 암몬 땅이었던 걸 아모리족이 뺏은 것이고, 그걸 이스라엘이 다시 차지해 삼백 년간 거주해 온 것이죠.

그래도 이제 와서 이걸 내 놓으라는 게 억지죠.

그 말은 중국 지린성이 발해 때 우리나라 땅이니 내놓으라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이런 억지 주장에 길르앗 사람들은 맞설 능력이 없는 것이죠.

땅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떠돌든지, 맞서 싸우다 죽어서 땅을 넘겨주든지, 둘 중 하나밖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를 떠올린 것입니다.

입다가 큰 용사였고 지금 군대를 이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죠.

그래서 입다를 데리러 돕 땅으로 갑니다.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자존심이 좀 상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해서 절대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또 우리가 좀 빈궁한 처지에 있다고 기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돈도 돌고 도는 것이고 요즘 뉴스를 보면 권력도 마찬가지죠.

얼마 전 기사를 하나 읽고 마음이 좀 착찹했습니다.

영구크린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영구씨 있잖아요?

한 달 용돈 십만 원으로 버티며 악착같이 돈을 번 자수성가 스토리가 유명했죠.

그렇게 아껴서 모은 돈 56억을 주식으로 잃고, 친구에게 사기당해 다 날렸다고 하더군요.

일만 하다 건강도 잃고 돈도 잃고 죽음까지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통장의 내 돈이 언제까지 내 것일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따 놓은 당상도 없고, 보장된 것도 없는 게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겠죠.

수모를 당하고 쫒겨났던 입다는 이렇게 해서 민족들의 위기에 오히려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런저런 이유로 남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것 진짜 고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결국 요셉에게 가 고개 수그리잖아요?

만일 우리가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높여주실 때가 올 것입니다.

 

2. 입다가 사사가 되어 암몬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뽑은 입다가 사사가 될 수 있을까요?

29절상반절에 이렇게 나오죠.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하나님이 입다를 사사로 세우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순서가 좀 바뀐 것입니다.

사실 입다를 쫒아낸 길르앗사람들이 입다가 사사가 된다면 따르겠습니까?

내가 소명을 받았다고 해 봤자 누가 믿겠어요.

그러니 이번엔 길르앗사람들 스스로가 입다를 인정하고 우두머리로 세우는 방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입다는 장관이 되자마자 먼저 암몬과의 협상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중간의 교섭 내용을 읽어보면 입다에 대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답지 않게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합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까지의 과정을 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지도자의 꿈을 갖고 준비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입다는 암몬왕에게 사신을 보내 이 땅이 왜 우리 땅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조목조목 따져서 반박합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이 암몬과 모압과는 싸우지도 말라고 하셨다. 너희가 우리 지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서 국경선 외곽으로 우리가 돌아갔다. 그런 우리가 왜 너희 땅을 차지하겠냐. 우리는 아모리족과 싸웠고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만일 길르앗이 너희 땅이면 왜 삼백 년동안 찾지 않았냐.’

입다는 싸움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알고 그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확고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시험이 오고 삶이 갖은 풍파로 공격당할 때가 있죠.

그때 여기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내 신앙의 이력이 강력한 갑옷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암몬의 야욕은 꺾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체가 된 틈에 그동안 탐났던 기름진 땅을 차지하려는 것이죠.

결국 두 진영이 마주한 전선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진군하려던 입다가 갑자기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는 왜 이런 서원을 했을까요?

처지가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입다는 능력은 타고 났지만 비천한 출생 탓에 날개가 부러진 사람입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쫒아냈던 입다를 찾으러 온 걸 보면 그만한 능력 가진 사람이 더는 없다는 뜻이죠.

아버지 길르앗의 집안은 꽤 유력한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정실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입다는 충분히 길르앗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과 가문에서 쫒겨나 정처없이 떠날 때 입다는 이를 갈고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어디서 농사나 짓고 있을 수 없었고, 전쟁할 힘을 키운 것이죠.

스스로 불우한 운명에 맞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기회가 찾아왔잖아요?

이 전쟁의 승리가 입다에겐 너무 간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를 저주했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게 수모를 갚아 주고 싶은 것이죠.

그 간절함이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내 인생에 뭔가 해 보이겠다, 나를 증명하겠다, 그런 마음은 자꾸 입다와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로마서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예수님이 오해와 천대를 받으셨지만 자기를 증명해 보이려고 한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도 그런 주님을 따르다 보면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입다의 경우는 너무 말이 안됩니다.

왜 자기 마음대로 누구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합니까?

내 사업 잘 되게 해 주시면 내 동생 아파트 팔아서 헌금하겠다는 얘기 같은 거 아닌가요?

아무리 성령께서 임하셨다 해도 입다가 가진 신앙관, 도덕성, 인간성 같은 것이 갑자기 변화되는 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보면 알잖아요?

얼마나 더딘지, 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잖아요?

입다는 영락없이 사사시대 사람입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가나안부족들을 진멸하라고 하실 때 그 이유 중 하나에 가나안의 인신공양이 들어갑니다.

율법에도 아주 분명하게 인신 제사를 금지하셨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인신공양은 신에 대한 최고의 헌신으로 여겼습니다.

입다가 인신제사를 놓고 하나님과 협상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러나 한편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때 최고의 헌신을 드리겠다는 무지하지만 약간의 진정성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남을 드리겠다니 얼마나 모순입니까?

사람이 스스로가 모순인지도 모르고 살죠.

이스라엘 민족들은 가나안의 우상숭배 영향을 그만큼 받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입다가 참 불행한 사람 아닙니까?

인생의 피해자, 그리고 하나님을 몰랐던 사사시대의 피해자인 것이죠.

우리가 타고난 인생으로 당한 괴로움은 어찌할 수 없지만, 사사시대의 영적 어두움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더욱 힘써서 영적 무지를 벗고 인생을 더욱 복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입다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도시는 환영인파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마음은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겠죠.

하나님 앞에 서원을 이행할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집에 가까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갔을 것입니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심장이 철렁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하죠.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의 이 딜레마가 처절하죠.

제가 이런 상황이라면 입다처럼 서원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록 입다가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잘못된 서원은 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믿음은 하나님께 한 서원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서원할 때 지키려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오늘 입다를 보며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께 멋대로 말하고 잊어버리고 돌아서 버리는 현대 신자들에게 입다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이나 아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주님, 아이 엠 소리 하지 않습니까?

제 형편 잘 아시죠?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런 우리가 입다가 무지해서 딸을 죽였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이런 인신 제사를 막지 않으셨나 하는 아쉬움도 있죠.

그러나 우리 살면서 하나님이 강제로 죄를 못 짓게 하신 적이 있던가요?

다윗이 우리야를 죽일 때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잖아요?

죄는 말씀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내가 순종해서 막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이 왜 막아주지 않으셨냐는 건 어린 아이 생떼 같은 것이죠.

하필 외동딸이 먼저 나와 번제가 된 게 안타깝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나왔다면 더 나았을까요?

저는 딸이 제일 먼저 입다를 맞으러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잘못된 서원으로 곤궁에 빠진 입다를 위해 배려하셨다면, 그때 딸이 제일 먼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딸을 희생했기에 입다는 자기 영광을 위해 남을 잡아다 바친 악인의 오명은 벗은 것이죠.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입다를 보시는 마음이 남다르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입다는 구원자였지만 아버지집과 동족들에게 멸시받고 쫒겨나잖아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그런 대우 받으시잖아요?

만일 주님이 헤롯왕가에서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평가하고 무시하고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지만 구원자셨죠.

입다가 그런 면에서 예수님 그림을 맞춰가는 한 조각의 퍼즐인 셈이죠.

입다가 딸을 바친 것은 가나안종교에 물들은 분명한 죄입니다.

그러나 딸을 번제로 바치는 그 입다의 마음을 하나님은 아시잖아요?

하나님도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주실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아픔과 고난을 공감하십니다.

우리가 병상에서 아파할 때 예수님은 생생히 기억하시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 아픔을 느끼십니다.

주님은 기억력이 너무 좋으셔서 단 한 가지도 잊어버리실 수가 없잖아요?

배신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아파할 때, 생계가 막막할 때,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겪어보셨던 그 마음으로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주님이 알고 계시다는 게 가장 큰 위로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딸까지 희생한 입다는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뒤에 보면 입다는 또 기드온 때처럼 시비를 거는 에브라임지파와 싸웁니다.

그런데 42천명을 죽여 잔혹한 피를 흘립니다.

에브라임지파의 장정들은 거의 다 죽은 것이죠.

그리고 입다는 사사로서 불과 6년을 다스리고 죽습니다.

이것은 입다의 서원과 잔인한 동족 전쟁을 하나님이 인정하지는 않으셨다는 결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입다도 보는 관점에 따라, 난세에 권력을 잡으려는 야심가일 수 있습니다.

민족들 앞에서 했던 서원이기에 딸을 희생하면서까지 명예를 지킨 매정한 부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입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점, 단점, 약점, 늘 빠지는 죄를 아십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수님의 구원을 믿으면 그것으로 우리를 믿음의 전당에 올려 주십니다.

사사시대 암흑기에 누구인들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믿음의 사람 입다를 통해 하나님은 그보다 더 약하고 못나고 주님을 배신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의롭고 온전해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약점을 가진 채로 평생 주님을 섬기다 주님 품에 갈 것입니다.

오늘 입다에게서 인간의 애환과 그 속에서 자기에 대한 연민으로 발버둥치는 우리 죄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좇았던 사사시대, 구원자가 자기 자신조차도, 유일한 자식조차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흠없는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리고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 믿어 평안을 누리며 죄와는 잘 싸워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