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이삼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 (요한1서3장1절-12절)

남수연 2011. 10. 11. 15:56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하나님으로 믿은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본질적인 죄가 말끔히 사라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제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랑스런 존재이고 죽음 이후에 영원히 살 아름다운 천국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믿음을 선택한 결과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수지 맞았는 지 이 땅의 가치관을 가진 우리들은 셈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셈을 제대로 했다면 웬만한 고난 쯤이야 너끈히 이기고 이 자리에 주체 못할 기쁨으로 나와야 맞을 텐 데 그렇지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땐 믿음이 손에 잡힐 듯하고  믿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생활이 바쁘고 힘든 일이 계속될 땐 하나님도 생각 밖으로 슬그머니 밀어 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여기저기 나뉘고 혼돈 된 정보와 소문들 때문에 어느새 약해지는 믿음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 사도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들에 써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들의 편지는 대개 고난과 시험 중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권면과 위로의 글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을 보면 이 편지를 읽을 사람들에게 무언가 신앙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서 이 문제가 무언지 짐작할 수 있죠.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지금 어떤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꼬이고 헷갈리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믿음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 사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죠.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 사상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이 편지가 기록 된 시점이 요한 사도의 나이 80세가 넘어서라고 추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하신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이 넘었다는 것이죠.

우리 50년 전 일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까마득합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으신 분들도 많네요.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 역사적 사실 조차도 가물 가물해지고 마치 옛날 얘기 같고 신화 같이 느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듯이 당시 성도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만있어 보자,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게 정말 맞는 소리야?

영광스런 하나님이 죄로 오염 된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는 게 있을 법한 얘기냐구.

아마도 예수님에게 잠시 하나님의 영이 들어갔었을 뿐이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예수일 뿐이었다구.

부활과 승천은 실제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야.

이런 생각들을 하는 무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요런 무리를 대해 요한사도가 다음 편지인 요한2서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지금도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의롭고 완전한 존경할 인간 성인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명백히 이것을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 중에는 또 한편 이런 부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고 죄악으로 더렵혀진 육체는 영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육체는 원래 죄로 오염되었으니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는거다.

애라, 어차피 버릴 몸 죄의 욕구대로 마음 껏 살면 된다.

술은 몸에 해로우니 먹어서 없애자란 말이 옛날  MT가면 꼭 나왔었죠.

그런 터무니 없는 논리나 마찬가지죠.

그러면서 타락 된 생활을 마음대로 즐기며 오히려 경건한 성도들을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에 지금 성도들 귀가 쏠깃 해졌으니 큰일 난 것이죠.

우리가 이해 안 되는 영적인 이치들을 그럴 듯하게 풀어준다고 다 맞는 게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제일 이해가 안가고 제일 궁금한 기독교의 영적 원리는 그 누구도 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심오한 영적인 원리와 하늘의 일들을 피조물인 인간의 뇌로 다 이해 할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그런게 바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성경의 모순되게 보이는 이야기들과 아무리 뜯어 맞추려 해도 맞지 않는 정황들이 바로 기독교가 인간의 사고와 이성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걸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게 뜯어 맞춘 요런 이단들이 잘 믿는 성도들까지 미혹하려 들기에 요한 사도가 오늘 급히 편지를 써서 부친 겁니다.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살며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도 요한이 아직 살아있는데도 그 옆에서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진가 봅니다.

요한3서에 보면 이런 요한사도의 책망을 전달한 사람을 맞이 한 성도들을 오히려 악한 자들이 교회에서 내쫒았다고 합니다.

사도도 없고 예수님도 한번 본 적도 없는 현대사회에서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믿음을 지키는 우리들도 반드시 긴장하고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에게도 얼마든지 적그리스도의 영이 접근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에서 바울 사도역시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고 경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느냐고 제자들이 물을 때 마태복음24장11절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요한사도의 권면을 잘 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편지는 성령께서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 이 성경을 읽는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경계하도록 씌여진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믿음과 가정을 사탄의 세력들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들로 인해 우리가 믿음이 떨어지고 있다면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이 악한 영들이 비밀스런 공작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들이 우리 주변에 더럽고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가장 그럴 듯하고 설득력 있게 젠틀하고 우리 마음이 혹하게 다가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보면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 사도는 그들의 말에 현혹 된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어떤 의혹이나 시련이나 환란 중에 언제고 제일 먼저 기억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 바로 1절의 말씀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낙심하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매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고 자녀를 삼으려고 얼마나 큰 사랑과 희생을 치르셨나를 똑똑히 지켜 본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형벌의 과정을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사도는 제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그 죽음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못 박힌 손이 찢겨져 피가 흐르고 채찍에 맞은 상처의 고통으로 신음하시던 예수님과 어느 순간 요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신히 입을 열어 요한에게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요한복음 19장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

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 제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사역당시 자기 어머니를 보내 예수님이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면 자신을 최측근으로 세워줄 것을 부탁했다는 내용이 마태복음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따랐던 주님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사도요한은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참혹한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만일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죽음만을 목격했다면 그가 죽을 때 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위해 살았을까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배웅했던 제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죠.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주님을 요한 사도가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요한사도는 직접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시고 다시 올라가시는 저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을 향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이성의 범위를 넘어 영적으로 깨달아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요한은 1절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제발 좀 보라 고 성도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대신 그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신 사랑을 좀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너무 처참했기에 요한은 그 계산이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에 매 순간 경탄하고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증언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아버지께서 바로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아무 잘한 짓 없어도 그것을 믿는 것 만으로도 우리를 착하다고 하십니다.

몇 년 전 폭설 속에 갇혔던 한 재미교포의 죽음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부인과 함께 4살과 7개월 된 딸을 데리고 가족여행을 떠났던 제임스 김이 오리건 주 산악지대에서 길을 잃고 폭설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김씨 부부는 차 안에 있던 분유 몇 병과 비상식량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버텼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 휘발유가 떨어져 난방도 안되는 차 안에서 추위를 견디며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고립된 지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김씨는 구조요청을 하겠다고 손전등 2개만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틀 뒤 조난 9일 만에 헬기 수색팀은 기적적으로 살아있는 아내와 두 딸을 구조해 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냅니다.

아버지는 추위 눈보라와 싸우며 길도 없는 설원을 13킬로 미터나 걸어갔다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수색대는 먼저 설원에 넓게 펼쳐 둔 아버지의 옷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왜 옷을 벗었을까요

와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표식이었겠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느끼며 헬기가 가족을 구조하러 올 때 조금이라도 눈에 잘 띄게 그 혹한 속에서 옷을 벗어 펼쳐두고 가족이 있는 곳을 향해 얼마를 더 걸어갔던 것입니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 속에 죽어가면서도 가족을 사랑한 아버지의 사랑에 미국인들이 울었다고 합니다.

하얀 설원에 두 팔을 펼쳐 놓은 아버지의 겉 옷은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팔을 벌리고 죽으신 사랑을 생각할 때 어떤 고난도 유혹도 시험도 이겨낼 줄 믿습니다.

2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임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비록 주님을 믿기 전에 나와 믿은 다음의 내가 그렇게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믿음이 늘 넘어지고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의연하게 이겨내기는커녕 여전히 두려워 전전긍긍할지라도 요한사도는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자녀들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가 다 주님과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언제고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배스티언이란 생물학자는 나무 덤불속에 집을 짓고 사는 한 거미류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 거미는 덤불에 걸쳐 있는 울타리 속에 새끼들을 부화시키고 키웁니다.

만일 그 곳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생겨 새끼들이 놀라면 어느 순간 어미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이 어미 거미가 어떻게 새끼들의 동요를 그렇게 금방 알아채는지 궁금해진 생물학자가 세심히 살펴보니 새끼 거미마다 가는 비단 줄 같은 게 붙어 있고 이것이 어미 몸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새끼들이 적들의 위협을 받아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그것을 느낀 어미가 즉시로 새끼들을 보호하러 달려오는 것이죠.

호세아서 11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어떤 위험에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줄에 매여 있음을 믿습니다.그래서 오늘 요한사도는 혼란과 불안과 시련을 당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힘겹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 다음 요한사도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영적으로 직시할 것을 말씀합니다.

10절 말씀대로 이 세상은 명확하게 두 집단으로 구분 되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런 영적인 원리에 관심도 없으니 난 아무 소속도 아니야 라고 말해 봤자소용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해있느냐 마귀에게 속해있느냐 둘 중 하나라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고 몸을 숨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도 두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속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 제시합니다.

10절에 보면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인간이 어디에 소속되었는지를 아는 시금석이 있는 데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고 있느냐와 둘째로 형제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큰 일 났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점수를 매기자니 두 가지 다 컷트 라인에 걸릴 것 같습니다.

이 기준은 우리가 정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다른 걸로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이 기준이 되는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길 원합니다.

 

첫째는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죄를 지어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구원은 받았으니 무가치한 육체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미혹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는 엄연히 불법이고 정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녀라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8절에 보니 여전히 죄를 짓는 사람은 아무리 입으로 자기 믿음을 자랑한다 해도 그 실상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마귀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죄를 다 버리고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왜,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차마 고의적인 죄를 계속해서 짓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6절에 죄를 짓는 사람으로 번역 된 부분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처럼 죄를 지었으면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그런 심령이 아닙니다.

뻔뻔하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 죄라고 말한 것을 개의치 않고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 현장의 참혹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직접 들었던 요한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죄를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만일 성도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이 바로 내 죄 때문이란 걸 알면서 그 앞에서 계속 죄를 짓겠습니까?

나를 위해 고통당하고 죽으시는 주님 앞에서 또 죄를 저지르고 싶겠습니까?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게 통곡하던 여인들 옆에서 주님의 옷을 누가 차지할지 제비뽑기 하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죽으심을 생각하면 죄를 즐기며 주님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심령이 죄가 분명한 행동을 하나씩 허용하게 되면 어느새 우리 옛사람의 죄성이 점점 자라나고 우리를 황폐한 죄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깨어진 유리창 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범죄학자 윌슨과 켈링의 논문 제목입니다.

어느 날 불량배가 가게 유리창을 깨고 도망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깨진 유리창을 갈지 않고 종이로 대충 가려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이상하게 가게 앞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하고 벽에 낙서가 등장합니다.

가게 주변은 온통 불량배들이 모이고 싸움판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눈에 띄게 줄어 갔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이런 결과는 깨진 유리창을 방치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한 가게주인이 건물을 포기했고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기들도 그 곳을 가볍게 여기고 결국 쓰레기와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가벼이 생각하고 회개를 통해 심령을 깨끗하게 고쳐두지 않는 다면 어느 새 온갖 악하고 어두운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단호하게 멀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증으로 날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두 번 째 증거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야 말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도 우리를 난처하게 하시네요.

우리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사도는 12절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을 아예 살인자인 가인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하지라고 합리화 시키려 할지라도 성경은 명백하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너무 하시다는 생각이 좀 들죠?

우리 곁에 있는 가족도 전심으로 한결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를 모르셔도 너무 모르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약점을 합리화시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의당 어떤 누구이건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이건 저절로 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저절로 되어지십니까?

아니요. 육체의 소욕과 무지 싸워가면서 해야 하는 게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은 추스르지 않으면 어느새 낙망의 자리에 가 있잖습니까?

그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도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기도보다 더 힘든 싸움을 하며 믿음으로 행동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은 사랑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끼치게 싫은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절대로 용서라는 혜택을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용서가 다 뭡니까?

그가 잘 되는 게 나의 불행이고 용서 못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든 보여주고 갚아주고 싶은 상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지라도 사랑해야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않되도 그 명령에 순종한 다는 것이죠.

나는 사랑하지 않지만 미워하지는 않아 라며 사랑 아닌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나의 이익과 상관대면 언제든지 미워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12절에 가인과 아벨을 말씀합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인정받고 가인의 온전치 못한 제사가 거부당하기 전까지는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였습니다.

하나님의 추궁에 대해 그가 대꾸한 말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우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왜 내게 아우가 어딨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아우에게 무관심했던 그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답변이죠.

나는 사랑하지 않지만 적어도 미워하진 않아.

그러나 적극적인 사랑이 아닌 무관심은 언제든 내 이익에 따라 미움의 대상도 되고 증오의 대상도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랑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없다는 증거라고 사도요한은 오늘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거창한 행동강령을 나누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우리 실력으로 그런 큰 사랑은 어려울지 모릅니다.

다만 오늘 말씀에서 요한사도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가인과 아벨을 통해 우리 곁에 있는 가족들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줄 믿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아내를 뇌암으로 먼저 보낸 한 남편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죽기 전 정신이 흐려져 되는 대로 써놓은 글을 남편 스스로가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영아빠, 오랜 세월 투병하는 아내를 옆에 두고 지켜보는 심정 또한 많이 아팠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네요.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떠납니다.

시신이라도 남을 위해 주고 싶었지만 썩은 육체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입니다.

지영아빠, 미안해요.

배우자로 너무 일찍 가서 미안하구 아이들이 다 자라지 못했는 데 떠나서 미안해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무쪼록 우리 아이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키는 당당한 아빠가 되기를 빌어요.

이제 와서 보니 너무 힘들게 살았던 부분들이 무슨 소용 있었나 싶네요.

사랑하기도 바빴을 걸 왜 진작 그러지 못했나 아쉬움도 있지만 이제 진정한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먼저 가서 미안하지만 앞으로 더욱 사랑하며 높은 곳에서 당신이 너무 힘들어 할 때 함께 기도할께요.

여보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알아보기 힘들게 써 놓은 아내의 편지를 통곡하며 정리했다는 남편은 그 아래 사무치게 아내가 보고 싶다는 글을 남겼더군요.

지금 우리 곁에 사랑할 가족이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함께 험한 인생길을 헤쳐 온 남편과 아내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 가죽만 남은 우리 부모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격려가 있어야 될 자식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너희가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오늘 꼭 순종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믿음에 견고하게 서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 걸음을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라면 마땅히 죄를 멀리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마귀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과 경멸이 있다면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의 가정들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고 생기가 넘치는 가정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가인과 같이 본래 가족조차 사랑할 수 없는 우리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랑하기로 순종할 때 반드시 사랑할 능력을 덧입혀주실 줄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