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기간에 갑작스런 개성공단 폐쇄 문제로 다들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공단에서 철수하는 긴박한 과정에서 혹시라도 억류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평화로운 통일에 대한 희망은 더 멀어지는 것 같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점점 사람들이 예측하고 원하는 대로 돌아가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국가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모두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다시 우리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고 요한일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부터 옵니다.
요한일서는 요한사도가 그의 신앙지도를 받던 교회들에 보낸 서신입니다.
신학자들은 보통 이 교회들을 요한공동체라고 부릅니다.
편지를 받는 교회들의 형편은 크게 어려웠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제국의 도미티안황제의 지독한 박해에, 신앙적으로는 이단들과의 격전을 치른 뒤였습니다.
성도들의 삶이란게 항상 이런 위기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세상과 치열하게 상대해야 하고 신앙적으로도 믿음이 한결같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긴장과 갈등 속에 삽니다.
어느 쪽 하나도 만만하고 순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각 세대나 개인 생애 중에 종말적 의미의 큰 시련들이 있고, 신앙의 혼조 속에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고 믿음을 떠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요한일서의 시대에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벌써 박해와 이단자들의 사상에 미혹되어 교회를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13절에서 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남은 성도들이 또 위기가 올 때 이겨낼 수 있도록 이단자들이 흔들어 놓은 구원의 확신을 다시 다지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영생을 확신하는 믿음만이 시련의 파도를 만나 삶이 출렁일 때, 중심을 잡아주고 파도를 잘 타고 넘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무늬만 있는 믿음은 위기에서 침몰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지도하던 교회에 진리를 전복시키려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경각심을 주는지 모릅니다.
사도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숨소리를 직접 듣고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사람입니다.
제자들 중 유일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증인입니다.
그 사도가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있는 데, 증인의 증언을 뒤집었고 거기에 동조한 성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와 성도들에게 왜 마귀가 이런 공격을 멈추었겠습니까?
그때 그들이 공격했던 내용들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지금도 교회에 침투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만한 진리 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사도요한의 편지는 이단자들이 공격했던 부분들을 점검하고 다시 바로잡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구원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먼저 18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들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반대로 범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거듭난 성도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잖아요?
이것은 요한공동체에서 갈라져 나간 이단자들의 범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16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이단자들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죄가 무엇인지는 요한일서 전체를 통해 볼 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신앙의 측면에서 그들이 성경과 다른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특히 구원의 중심인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성경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요한사도가 싸웠던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라는 분파입니다.
이집트에서 학문을 배운 케린투스라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진리를 공격했고 많은 교인들이 거기에 현혹되어 그를 따랐습니다.
유학파의 새로운 신학적 도전에 대책 없이 넘어간 것이죠.
1세기 경 이집트는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역사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들과 어떻게 싸웠는지 교부들의 증언을 통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영지주의자인 케린투스가 주장했던 게 무엇인가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와 요셉사이에서 태어난 단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이지 않습니까?
세계의 4대성인이지만 신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구약성경에서 약속했던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와서 사역을 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기 전에 다시 비둘기처럼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그냥 인간 예수라는 것이죠.
따라서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깨달은 이런 영적인 지식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에 도달한 고상한 영혼은 육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몸이 죄를 지어도 영혼의 구원에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 듯 합니까?
이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에 요한 공동체가 요동치고 많은 사람들이 케린투스를 추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진리에 대해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게 사람들에겐 오히려 성경보다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 잠시 내려와 사람 몸에 들어왔다 다시 올라갔다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 죽었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성육신했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는 예수님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분명하게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 한 절에도 세 번씩이나 거듭 말씀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길고 긴 구약성경시대를 통해 하나님께서 밑밥을 쫙 깔아 놓으신게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를 속죄하고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죄 없는 속죄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죄해줄 죄 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셔야 한다는 것이 구원의 핵심인데 그걸 부정하면 무엇을 근거로 죄를 용서받겠어요?
생전에 김수0 추기경이 김용0 씨와 나눈 대화를 보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김용0 씨가 추기경에게 왜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냐고 질문을 합니다.
거기에 대해 김수0 추기경은 그건 사람들의 오해라고 답하더군요.
천주교의 하느님이나 우리민족이 믿던 천지신명이나 유교의 도덕률이나 다 똑같은 데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 오해를 해서 박해하고 순교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만 아니라 어느 종교든, 누구든, 참되게 살고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면 다 구원받는다고 추기경이 말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발언입니까?
사람들이 늘 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왜 죄인이냐, 나는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비양심적으로 말하잖아요.
절대자를 믿든 말든 각자의 양심이라는 고무줄 잣대를 갖고 옳다고 살아가면 인간은 구원 받는다니 누가 이런 신앙을 마다하겠습니까?
인간이 되어 내려오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게 아닙니다.
케린투스 같은 이단자들의 주장이 당시 사람들에게 더 먹혔다는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사람들도 과거 오십년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내 죄를 속죄했기에 구원받는다는 것보다, 내가 영적인 특별한 지식들을 깨달으면 구원받는다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무슨 도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려는 종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죄를 아무리 짓고 살아도 도만 터득하면 영혼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니 더할 나위 없는 것이죠.
오늘 요한사도의 편지는 이런 배경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기에 이것을 모르면 본문의 내용을 엉뚱하고 막연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도 보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좀 철학적이고 변증적인 방식으로 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모든 사도들이 다 순교하고 난 뒤 노년에 홀로 남아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싸운 흔적입니다.
헬라 철학으로 무장한 이런 이단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구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성경을 이런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확실한 해석이 안될 뿐 아니라, 성경을 사실이 아니라 신화나 추상적인 종교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앙은 역사와 현실과 우리 인격에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사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이런 배경에서 알지 못하면 애매한 주장이 됩니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앞에 보면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한 말씀과 모순되잖아요?
본문의 말씀은 이런 이단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확실한 증거들을 믿지 않는 죄에 거듭난 성도들은 절대로 빠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이 이단자들과 그에 동조하여 태연자약하게 죄를 짓던 사람들과는 구별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절대로 그렇게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의 자리에 뭉개고 눌러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죄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성도들은 분명하게 죄를 짓지 않겠다는 입장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처럼 영적인 지식을 알고 구원을 받았으니 몸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입장과 완전히 다릅니다.
요한사도는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분명한 증거로 부도덕한 죄악과 이웃을 미워하는 점을 딱 지목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현대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교회에 나오니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지만 저들과 똑같이 사는 성도들은 과연 어떠냐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심령의 불편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게 됩니다.
또 성령께서는 사랑하고 용서하도록 성도들의 마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꼴도 보기 싫었던 사람들의 미운 꼴도 점점 봐주게 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남을 이해하고 점점 너그러워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만한 객관적인 선행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죄의식 없이 늘 습관적인 죄를 짓고, 이웃과 늘 갈등을 빚고, 세상도 비웃는 하찮은 도덕심을 갖고 살면서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찬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섣부른 면죄부가 너무 남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죄의식을 모르고 본성에 따라 여전히 죄를 지으며 교회의 신앙만 받아들인 것은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본문에서 진위를 분별할 경각심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을 줄을 우리가 아노라
구원받을 진리와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무감각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올바른 구원의 지식을 알고 회개하고 믿어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8절 하반절에서 우리가 이렇게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지 않은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망에 이르는 범죄는 악한 마귀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호가 없으면 악한 자가 언제든지 손을 댄다는 뜻이죠.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을 악한자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들의 생각과 영혼과 환경에 이미 악한 마귀의 손을 타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의 손을 타면 그 인격은 점점 죄와 친해지고 그 환경은 마음과 육신을 괴롭게 할 만큼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요한사도는 19절에서 날카롭게 경계선을 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
세상에 두 부류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악한 자 안에 처한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일 영적인 세계가 지금 훤히 보인다면 하나님의 보호막을 입고 있는 성도들과 악한 마귀의 영역 안에서 무방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을 중립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그들의 영혼은 악한 자 안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멀쩡하게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인 마귀의 농간을 눈치 채고 대항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도 마귀가 넣어준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알았고, 마귀가 악화시킨 환경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보면 고양이가 쥐를 잡아 놓고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경우가 있었죠.
그런 상황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마귀의 덫이 인생에 여기저기에 놓여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추문에 휩쓸려 정상에서 곤두박칠 치는 유명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귀가 손을 까딱하면 사람을 파멸시킬 숨겨진 죄악들이 순식간에 발각됩니다.
그런 숨겨진 죄야 얼마든지 있잖아요?
우리 죄가 다 드러나면 우리도 고개 들고 못 다닙니다.
세상적으로 마냥 잘나가는 사람들은 결국 인기와 명예욕에 노예가 됩니다.
그걸 줬다 뺏으면 자살하잖아요.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창업주 일가들이 죄 안 짓고 돈 번 사람 있습니까?
이렇게 돈 번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에게 정말 유익하고 복되게 사용할 수 있는데도 절대로 돈을 못씁니다.
이미 돈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돈을 탐욕스럽게 깔고 앉아 있다 죽을지언정 의당 나눠줘야 할 사회에 풀어놓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3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것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제아무리 권력이 있고,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다 가졌다 해도 마귀의 손을 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하나님께 속했지만 이 두려운 사실을 분별하고 스스로도 거기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앞서 2장15절에서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추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입니다.
마지막으로, 20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찾은 것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나 사상이나 수련을 통해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하나님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할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는 정신이상자이거나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죄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지고한 사랑과 겸손과 거룩과 진실하심을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돌이켜 상기해야 할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증거이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다는 명백하고 유일한 증거입니다.
제가 왜 거의 매주 빼놓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속죄하셨다, 우리는 죄인이다, 예수님의 속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질리게 거듭 말씀드리는 지 아십니까?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고, 이 복음을 말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깨닫게 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나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점점 생기는 것입니다.
눈물이 왈칵 나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분들께는 이것 이상의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백 날 원수를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고 그런 말 해봤자 왜 그래야 되는 지도 모르고,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부담만 됩니다.
이미 거듭나고 하나님을 알게 된 성도들에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 복음을 들을 때 침체되었던 심령에 다시 구원의 큰 기쁨과 감격의 생수가 솟구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디 보통 것입니까?
이 구원의 감격만이 매일 당하고 해결할 모든 문제들 속에 우리가 질식되지 않고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참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진리가 증거될 때만이 성령께서 죄인들의 심령을 되살려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새 생명은 더욱 더 믿음으로 강인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금값이 상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위기를 직감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역사는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 안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와 내 가족의 구원을 확실히 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이 나라와 민족과 우리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신 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키시기에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1절에 마지막으로 요한사도는 자녀들아 너희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큰 믿음의 싸움을 이긴 성도들이지만 다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우리도 항상 안간힘을 다해 신앙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고 믿음 안에서 행하는 복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직 빛이 있을 동안 빛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태양아래 아름다운 날들이 남아있고 은혜 받을 만한 이 때에 다들 구원받고 축복받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6년2월14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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