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려움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 가운데 임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반대 의미를 보통 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랑의 반대 의미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틈만 나면 우리를 지배하려고 고개를 드는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오늘 이 두려움의 실체를 파헤치고 우리 인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우리를 조정하고 있는 두려움을 사랑의 힘으로 내어쫒는 시간되시길 축원합니다.
성경에서는 두려움이란 말이 의외로 너무 빨리 창세기 3장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인간 최초의 두려움이 임했던 장소는 뜻밖에도 에덴 동산 입니다.
물론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는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죠.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좋았고 우리가 지금 꿈꾸는 이상향 그대로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3장10절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전에 알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동안 하나님과 누렸던 친밀감과 사랑은 간 데 없고 갑자기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뜻 나오지 못하고 나무 뒤에 숨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처음부터 그들이 벗고 있었던 것 다 아시죠?
벗었음을 핑계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를 못합니다.
사랑에 금이 가자 즉시 두려움이 사랑의 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원초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아담의 후손인 인간도 이 원죄로 인한 두려움을 갖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모습은 창세기3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를 알면서도 하나님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서늘할 때에 동산을 거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했던 아담의 범죄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느끼시며 그를 다시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걷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제와 꼭 같이 긍휼과 사랑의 음성으로 주님은 아담을 부르십니다.
자녀가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될 못 된 짓을 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근본적인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했다는 것은 창세기3장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담 자신이 너무나 하나님이 두려워서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어진 것 뿐입니다.
범죄 한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는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19절에 시내산 밑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산 위에 임하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 떨며 말합니다.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인간은 두려움에 스스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하는 대신 사탄의 유혹에 동의한 순간 인간의 마음을 두려움의 영이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단순히 인간의 나약한 감정이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 두려움을 영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시록21장8절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더불어 심판을 당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이 단지 심약한 인간의 감정일 뿐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18절에도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절대적인 문제이고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죄로 인한 원초적인 두려움에서 파생 된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던 하나님이 말씀도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이 된 것이죠.
창세기4장14절에 가인은 동생을 살해한 주제에 다른 사람에게 죽을 지도 모른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한 것을 통해 모든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교한 자 사단은 우리에게 있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본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죽음을 가지고 교묘하게 우리를 협박합니다.
죽음이야말로 많은 두려움 중에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죽을 사 자와 발음이 같은 숫자 4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희도 일산의 아파트가 403호로 당첨 됐을 때 기분이 약간 별로 였습니다.
중국에서도 죽을 사와 숫자4의 발음이 같고 일본에서도 희한하게 죽을 사와 숫자4의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선 아직도 빌딩 특히 병원에서는 4자 대신 F를 사용하는 곳이 많고 심한 경우는 3층 다음에 바로 5층으로 표시 된 곳도 있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이걸 보고 참 어이없어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는 자신들은 13이란 숫자가 무서워서 식탁에는 절대로 13명이 같이 앉지 않는 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각종 미신과 사이비 종교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인간을 짓누르는 각종 정신적 질병으로도 나타납니다.
폐소 공포증이나 건강염려증 같은 것이 바로 그런 병입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이들 환자는 보통 사람 같으면 지나쳐버릴 작은 몸의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 들이고 상당수 환자에게서 실제로 통증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유래한 삼재니 아홉 수니 하는 것도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걸 상술로 이용해 요즘은 삼재 소멸 카드니 부적이니 하며 몇 만원씩 하는 것들이 쇼핑몰에 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버드대 심리학 연구팀이 발표한 ‘공포감 지수’를 보면 여객기 내에서 추락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위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테러, 3위가 전쟁이 터졌을 때, 4위가 암흑천지의 탄광에 갇혔을 때 5위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을 때 6위가 고층빌딩의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순이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끼시죠?
이러고 보면 인간이 죽을 때 까지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방법이 무엇일까요?
담력을 키운다고 공포 영화를 많이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영화를 많이 보면 영적으로 눌려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수가 더 많이 있습니다.
해답은 오늘 본문 18절에서 말씀하듯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라고 기록 된 부분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쫓아낼 유일한 무기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는 것을 우리가 인생사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작년 겨울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일가족4명이 베란다 창문을 통해 긴급하게 손을 흔들며 구조요청을 하고 있었는데요.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화단 앞에 주차해 놓은 차를 치우느라 자꾸 시간이 흘렀습니다.
갑자기 창문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이고 가족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습니다.
화단 앞에 주차시켜 놓은 차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자동차를 밀고 난 다음에야 고가사다리차가 간신히 불난 집 아래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간 소방대원에 의해 먼저 어머니가 구출되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이 구출되었고 잠시 뒤에 아버지를 구조해 나오자 사람들이 인명 피해가 없어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그런데 세어보니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초등학생 막내가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아파트는 불길에 휩싸여 보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가 아파트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쫒아가 아버지를 끌고 나왔으나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 구조를 잘 아는 내가 들어가야 한다며 저지하는 소방대원을 밀치고 또다시 뛰어 들어가려 하자 소방대원은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산소마스크를 하나만 착용시켜 방화복도 없이 함께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가슴을 졸이고 있던 얼마 후 막내아들과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나오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방금 자신이 뜨거운 불 속에서 간신히 구출을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 그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아들을 끄집어 내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옥의 불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도 두려움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 올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고 은혜 받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측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쫒겨가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선포되는 실낙원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래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사랑을 가죽옷으로 표현하십니다.
너의 죄의 수치를 내가 가려줄 것이다.
죄 없는 나의 아들을 대신 버려 죽음에 대한 너의 두려움을 없애 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5장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
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두려워말라고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성경에서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세어봤더니 365번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매일 매순간 두려움을 느끼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매일 두려워말라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시편118편6절에 다윗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셔서 그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
이런 노래 아시죠? 이것을 작곡한 사람이 기독음대 한태근 교수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런 민주화 운동 노래 있지 않습니까? 미아란 가수가 리메이크해서 인기를 얻었었죠.
그는 성경구절에 찬양 곡을 붙이던 중 2002년 여름, 갑자기 방광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암조직이 너무 많이 전이되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한 교수는 “주님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 성구찬송을 만들지 않고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병상에서 암송하고 싶은 성구를 기록하고 오선을 긋고 곡을 붙여 나갔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 CT, 방광내시경검사를 여러 차례 했는데도 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죽음의 문턱에서 너무나 의연하고 아름답게 천국을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장55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내어 쫒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인간에게 있는 두려움의 또 다른 이유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 자기 미래만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와 두려움도 지나치게 자기의 안전만을 걱정하는 이기적인 자기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애를 쓴다 해도 보장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나친 자기애는 점점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 몰고 갈 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의 대상이 오직 자기 자신 뿐임을 알면 참 씁쓸해 집니다.
가족이요? 그것도 어쩌면 자기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족사진이 나오면 가장 먼저 보는 게 누구 얼굴이죠?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을 먼저 봅니까?
아닙니다. 다 자기 얼굴 제일 먼저 본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나에 대한 지나친 애정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대인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까 끊임없이
염려하는 데서 옵니다.
혹시 모임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돌아와서 자기가 했던 행동을 계속 되짚어보고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자꾸 생각이나 밤 잠을 설치곤 합니다.
이것도 지나치면 병적인 대인 관계가 되는 데 나중에는 정말 사소한 사람에게조차도 자신을 좋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인해 결국 모든 사람이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
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장 8절에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고
누가복음 12장 4절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사람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향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우리 속에 두려움이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할 때 두려웠던 감정이 사라지고 두려워 했던 사람에 대해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두려움에 이어 형제 사랑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받은 새 계명이 있습니다.
21절에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사랑이 부족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것은 방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요셉이야기의 백미는 바로 이 형제 사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특별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요셉은 아버지의 자녀인 자기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 깊이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 말은 아직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니? 음, 너는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하는거야 바로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동물들의 DNA속에도 놀라운 형제 사랑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기러기는 겨울이 오면 따뜻한 지방으로 먹이를 찾아 4만킬로미터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기러기는 한 마리의 리더를 앞장 세우고 브이형 편대를 이루어 떼를 지어 이동합니다.
앞장 선 리더는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날개짓을 하는 데 이때 생기는 기류의 양력으로 인해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공기 저항을 7분의1정도 밖에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러기들은 날면서도 쉬지않고 울음소리를 내는 데 이것은 앞장서서 바람과 싸우고 있는 리더 기러기를 격려하고 힘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동료 들 중에 한 마리가 총에 맞거나 원기를 잃고 떨어지면 기러기 두마리가 함께 낙오 되어 동료가 원기를 회복할 때 까지 함께 있거나 죽은 다음에나 무리에게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는 날짐승도 동료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눈물겨운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함께 힘겨운 날개짓을 하며 날아 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한 먼 여정입니다.
우리에겐 형제들의 기도의 울음소리가 필요합니다.
고난과 슬픔으로 우리의 날개가 꺾여 날아 갈 수 없을 때 위로해줄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3장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4장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나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 성도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세상과 두려움을 이길 힘이고 서로를 사랑할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께 간구하며 사랑과 관심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돌아보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주님은 끔찍하고 처참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마음의 고통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두려움의 총체입니다.
죽음이 있고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단절이 있고 사랑의 배신까지 맛보아야 했고 자신의 명예를 짓밟혀야 했습니다.
히브리서5장7절에 보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에서 승리하셨고 보라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시며 담대하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두려움을 이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기에 우리에게도 두려움을 이길 능력이 임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라는 단상이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몰아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의 누릴 기쁨과 평안을 빼앗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1장10절에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라는 말씀을 다시한번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잔인한 범죄들과 수많은 사고와 우리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르고 두려움의 영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적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두려움이 다 뭡니까?
우리의 삶이 살맛나게 바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계명 대로 형제를 사랑하기를 애쓰십시오.
우리의 이런 믿음과 순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심령을 빛나게 하시고 모든 두려움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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