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이삼서

요한일서2장15절-17절(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남수연 2018. 6. 15. 16:04

요즘 사람들이 소확행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보다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행복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갓 구운 빵을 찢어 먹는 작은 행복 같은 것이죠.

그래서인지 TV엔 여전히 맛집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먹는 즐거움이 제일 쉽게 맛볼 수 있는 행복이잖아요?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데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식히는 맛도 소확행이겠죠.

그런데 요즘 왠만한 음식점엔 냉면 한 그릇 값이 만원이나 한다고 합니다.

월드컵 축구 보며 온 가족이 즐기던 양념치킨도 요즘은 배달요금까지 내야 되니 한 번 시키려면 좀 부담이 되죠.

점점 소소하게 누릴 행복도 선택의 폭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심각하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마치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외면하고 경건한 신앙생활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이래야 소확행 정도인데 그것마저 멀리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신앙과 삶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은 곧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모든 성경의 권고는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얻으라는 것이지 가진 것을 뺏으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따름으로 모두가 더 행복하고 더 좋은 삶을 얻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는 요한사도의 서신입니다.

이 편지도 역시 어떤 동기가 있어서 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단 사상 때문입니다.

요즘도 이단들이 들어와서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분열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결국 이단에 포섭된 한 무리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죠.

요즘 한국교회에 골칫거리인 한 이단은 넌지시 들어와 교인들을 포섭한 뒤 아예 목사님을 내쫒고 교회를 통째로 이단교회로 바꿔버리도 합니다.

오늘 요한일서의 배경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큰 문제를 일으키다 추종자의 무리들이 교회를 떠난 사건입니다.

19절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런 배경을 모르면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편지에서 강조한 내용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것을 반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휘저어 놓은 것을 바로 잡고 진리를 공고히 하려는 의미인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철학과 여러 종교의 사상이 혼합된 좀 복잡한 종교사상입니다.

시대마다 다양하게 변천했습니다.

특히 1세기 말 요한사도 당시에 활동했던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을 알아두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 우리에게도 이런 이단 사상들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은 시대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교회를 위협하는 사상들이 영지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영지주의는 영적인 심오한 지식을 깨달은 특별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말이 나돌면 성도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특별한 영적 지식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을까봐 그 쪽으로 몰려갑니다.

지금도 우리교회에만 이런 영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를 믿고 내가 주인이었던 삶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뭔가 영적인 지식을 깨달은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깨달아도 회개가 안 된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22절에 그 내용이 살짝 드러나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1절을 보면 제일 먼저 요한이 무슨 말씀을 꺼냅니까?

태초부터 있던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우리가 그 음성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았고 함께 살았던 당사자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요상하게 각색해서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실제로는 한번도 예수님을 못 본 사람들입니다.

요한 사도는 최후의 만찬을 먹을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잖아요?

주님의 심장 박동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을 요한 이상 정확히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인간이 되셔서 이 땅의 역사의 한 정점에 사셨고 실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지금도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기에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를 보면 계속 강조하는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이단자들이 꽤나 교회에 싸움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참 믿음은 형제사랑으로 입증된다는 것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교회와 하나되고 서로 사랑하냐는 것으로 우리 믿음의 시금석을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있으면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강조하는 것이 신앙의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 죄의 문제입니다.

영지주의들은 영만 구원받는 것이고 죄를 짓는 육은 버려진다고 믿었습니다.

육체는 버려질 것이기에 때문에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괴상한 궤변을 만들어 냈습니다.

어차피 썩을 육신인데 아무렇게나 굴린다고 뭐가 문제냐는 것이죠.

영지주의의자들이 세상을 마음껏 즐기는 게 깨달은 자들의 특권인양 떠벌일 때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솔깃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도 된다면 듣기 좋잖아요?

오늘 본문은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세속적이고 타락한 행위에 대해 성도들은 결단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면 이전처럼 세상을 동경하고 애착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먼저 오늘 세상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와 이 땅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대립하는 사탄과 죄인들이 합작한 세속사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이 쌓아 올린 바벨탑 같은 것이죠.

같은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며 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엔 현재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문명과 편리한 발명품과 혜택을 누리며 살지 않냐는 것입니다.

세속 문명 중 그나마 인간의 공익을 생각하고, 악을 척결하고, 정의와 평화를 세우고 더 나은 삶에 기여한 것은 단연코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소극적이고 기피적으로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금욕적으로 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세속세상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으로 바꾸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우리에겐 크던 작던 다 그런 엄청난 파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속한 곳에선 우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점점 예수님의 이름이 거론되고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영역에선 어느새 하나님이 중심이 되게 되잖아요?

편지가 기록될 당시는 기독교가 신흥종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눈만 들면 온 세상이 다 우상종교와 세속나라였습니다.

그때는 세상문명에 대해서는 우선 기피하는 소극적인 대응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늘 16절 말씀은 이런 세속 세상에 대한 본질과 경향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도록 우리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나라의 본질도 똑같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속 세상의 모든 것이 대단하고 심지어 선해 보여도, 그 동기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악합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 약자들을 짓밟고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기업의 가면을 벗기면 부정, 부패, 착취, 사람의 탐욕이 민낯을 드러내죠.

세상 문명은 사탄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속세상과 사탄과 죄인은 서로 호흡이 잘 맞습니다.

왜 사탄이 이런 세상 것으로 시험할 때 사람들이 넘어갑니까?
자신의 본성과 딱 맞아서 덥썩 미끼를 물기 때문입니다.

뇌물 주면 다 덥썩 뭅니다.

여배우와의 설레는 만남을 덥썩 물었더니 정치인생이 시끄러워진 분도 있습니다.

죄인들에겐 이 세속세상이 전부입니다.

조금이라도 여기서 남보다 더 갖고, 맛보고, 누리려는 열망으로 삽니다.

최종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은 우리가 이런 세상을 곁눈질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밝히는 세상의 정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속세상을 보는 관점이 좀 더 달라질 것입니다.

먼저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천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갈망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갈망하는 것은 다 죄짓는 것입니다.

선해 보이는 동기까지도 내면을 보면 오염되어 있습니다.

성도들도 본성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안 할 때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며 생각하는 것을 보면 육신의 정욕대로 흘러갑니다.

로마서에서 이런 육신의 정욕이 일으키는 죄를 일부 예시합니다.

음란,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교만, 우매, 무자비. 게으름, 우상숭배 등등입니다.

여건만 되면 이런 죄가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육신의 정욕이 갈망하고 있다니 죄성이 참 끔찍하죠.

그러니까 육신의 정욕이 만들어 낸 세상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세상 따라 사는 게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이 육신의 정욕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표출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시각을 통해 일어나는 정욕입니다.

눈의 만족을 갈구하는 것이죠.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 일어납니다.

또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으로도 이 정욕이 일어납니다.

남과 비교해서 더 잘 입고, 더 멋있게 보이고 싶고,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는 그런 종류의 정욕이죠.

그런 마음 다 있잖아요?
그래서 빚내서 외제차도 사고, 성형중독도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남의 평가와 시선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과 어울릴수록 우리도 점점 더 안목의 정욕에 빠져들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런 세상이 주는 것들을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신앙으로 분별하며 지혜롭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이런 탐욕을 채웠을 때 자랑하고 떠벌이고 싶은 그런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몇 년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는 분에게 전화가 왔는데 결론인즉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랑하고픈 욕구 때문에 성공과 권력을 좇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다투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교만과, 자신을 더 과장해 보이려는 허풍과 분수를 넘는 허영심이 다 이생의 자랑과 통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점점 이생의 자랑이라는 정욕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그것만 통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결하게 사는 그런 고결한 생활은 뒷전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서 44절에서는 오늘 본문말씀보다 훨씬 강력하게 세상사랑을 경고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제 전처럼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 기준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세상과 더 잘 맞기 때문에 마음과 행동을 주의해서 다잡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끌려갑니다.

시간이 나면 성경을 보게 됩니까, 스마트폰이나 TV를 보게 됩니까?

우리는 그냥 세상일이 궁금하고 시시한 것들을 보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려고 앉아서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다 연예인들 공항패션, 영화이야기 같은 걸 한참 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어떻고, 요한일서의 주제가 뭐고, 이런 것보다 훨씬 더 부담이 없고 머리 쓸 필요도 없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니 매 생활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봅니다.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이 세상과 그것을 좇던 생애는 다 지나갈 것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자는 것입니다.

물 위를 지나간 배의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세상과 그것을 좇던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이생의 세월을 덧없이 흘려 버린 것입니다.

지난주에 일본의 돈후안이라는 별명이 붙은 77세 난봉꾼 갑부의 죽음이 기사로 났더군요.

미녀와 교제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는 이 노인은 생전에 미녀 4천명에게 3백억을 뿌렸다나요.

죽을 당시 함께 살던 아내는 55살 차이가 나는 21살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낸 책에서 '나는 일도 여자도 죽을 때까지 현역'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렇게 빨리 현역에서 물러날 줄 그는 몰랐던 것이죠.

그렇게 살고 그 사람의 평생에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도 정욕도 허무하게 지나가고 하나님 앞의 심판과 형벌만이 남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내세의 삶에서 영원한 기쁨과 보람으로 남습니다.

욕심을 절제하며 주님을 따른 것, 세상방식이 아닌 말씀대로 살아온 것,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낮추고 섬겼던 것, 그런 것들을 하나님나라에서 돌아보면 어떻겠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그때 내가 참 잘했구나, 참 잘 살았구나하는 뿌듯한 보람과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기쁨과 보람이 영원할 거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게 영원하잖아요?

이 땅의 신앙과 행위가 영원까지 갑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 또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우리가 세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론 힘겨운 싸움입니다.

매일 실패할 것입니다.

우선 성령님의 감화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를 지도해 주시고 세상을 따르지 않고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의 모든 지도는 일차적으로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세속적인 친구들이 세속적인 놀이로 이끌 때, 그들이 가진 세상의 삶이 부럽게 느껴질 때 오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단언컨대 세상의 아들들보다 우리가 입니다.

우리가 더 좋고 더 영원한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그 말씀을 적용하고 응용하는 지혜를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이단사상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진리들을 잘 기억하고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 이런 우리의 믿음이 생활 속에서 증명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세상은 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 옛사람의 고향입니다.

옛사람 안에 오래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듣고 배우고 경험한 세상적인 생각과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평생 걸린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아주 조금씩 세상 가치를 버리고 아주 조금씩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가는 것이죠.

그러다보면 점점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범위가 확장됩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가 확실하게 느껴지고 종일 하나님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늘 인식되기 때문에 편안하고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격동되고 탐심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묵상하는 시간이 많으면 현재의 삶이 불안합니다.

뭔가 더 준비하고 더 가져야 하지 않을까 조급함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장차 누릴 하나님의 나라를 더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얻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엔 오관을 통해 수많은 것들이 밀려 들어옵니다.

항상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속과 세상의 권력을 쥔 악령들이 밀려 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말씀과 기도로, 감사와 찬송으로, 말씀대로 사는 보람으로 채워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6월10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