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이삼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요한일서3장11절-24절 )

남수연 2013. 8. 5. 15:34

기독교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사랑입니다.

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주신 성부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영원하신 신성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이고 우리에게는 가장 큰 숙제입니다.

숙제를 다 하지 못한 학생의 찝찝한 마음처럼 항상 우리 마음에 불편하게 남아 있는 게 사랑의 문제입니다.

어쩌다 사랑이 없이 냉정한 나를 들키기라도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장 큰 숙제인 사랑,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았으니 오늘은 한번 그 말씀을 좀 나눠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족한 사랑을 한번 들춰 보고 사랑에 대해 좀 심층 분석해 보겠습니다.

요즘은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 책을 읽고 다양한 설교를 듣는 데 사랑의 계명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는 내용은 최근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팍팍한 삶에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생활에 지치고 냉냉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성도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설교는 정말 공허한 메아리 같을지 모릅니다.

이런 반응을 경험을 하고 나면 이 주제는 회피하게 되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자기를 사랑할 시간조차 없이 기계의 한 부품처럼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네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을 해오고 계십니다.

최초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입니다.

그것이 없기에 인간의 삶은 고통뿐이고 인간이 써나가는 역사는 파멸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특히 사랑이 식어지고 고통당하는 때가 될 것을 주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다 없어진다면 지옥이 뭐가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가정에서 가족 간에 사랑이 없다면 거기도 지옥입니다.

우리 가족들만이라도 예수님이 목숨을 주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주고 사랑한다면 아마 우리가 지금 겪는 고통의 절반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국내 한 일간지에서 한국인 2천명을 대상으로 누구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통계에서 주목할 것은 1위가 ‘가족’이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때로 가족이 웬수 같아도 그래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가족이 불완전하고 행복하진 않다 해도 세상 속에서 우리의 안정과 행복을 누릴 곳은 그래도 우리의 가족이고 가정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따스한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용기를 서로 북돋워 준다면 얼마나 더 살아갈 힘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그 계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나를 돌아보기도 버거운 현실이지만 이 계명을 지키는 게 우리의 복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어디 이웃만을 위해서이겠습니까?

결국은 이웃사랑이 내가 복을 받고 모두가 행복해 지는 유일한 길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고통을 위로받고 짐을 나눠지기 위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돈도 건강도 지식과 명예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그 삶은 고독과 허무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사도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생명으로 옮겨 갔는지 아직 사망가운데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왔구나 라는 증표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악한 자 사탄에게 속해있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판결을 내립니다.

하나님께 속했는지 마귀에게 속했는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말해준다니

평소에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우리로서는 참 두려운 말씀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특히 사탄에 속한 자들은 특정 무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후73년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맹공격을 받고 다시한번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다시 주권을 가진 국가가 된 것은 1948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이스라엘국가를 재건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여러모로 특이한 민족입니다.

국가가 사라지자 교회 공동체는 북쪽으로 피신해 소아시아 쪽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 영지주의를 쫓는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어제 이단에 대해 유익한 특강을 들었는데 초대교회 당시 성행하던 이단사상 중 영지주의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전체를 잘 읽어보면 이 이단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만 구원받을 거룩한 것이고 육체는 버려질 것이니 마음대로 방탕해도 된다는 괴변을 전파했습니다.

기존에 요한 공동체 내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성도들을 계속 꾀어내고 교회를 비방하며 악하게 굴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탄에 속한 무리들은 바로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 이단자들의 특징을 보니 마귀에 속한 미움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비되는 성도들의 특징은 사랑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도 제대로 못하지만 그렇다고 마귀에 속한 미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했지만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맞겠죠.

그럼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괜찮냐 하면 당연히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유일한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언제고 변함이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관계한 사람들은 때로 본문의 이단자들처럼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은 미워해도 된다고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명료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어떤 사람이든 우리와 관계가 된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통해 구원과 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원수 같은 사람들이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하기 힘들지만 우리에게 대상을 골라 사랑할 수 있는 선택권은 없습니다.

아무리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오히려 미워할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화평으로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두려운 상대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신기하게 두렵고 어렵지가 않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그런 사람들과도 화평이 옵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곁에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자나 철전지 원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를 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정도지만 우리 마음에 슬그머니 미움이 생기고 마음의 담을 쌓는 것이죠.

미움은 마귀가 우리 마음 밭에 슬쩍 뿌려놓는 씨앗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미움은 마귀에 속한 것이지 결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래서 평안이 깨지고 하나님 앞에 집중하기도 힘듭니다.

제가 오전 기도회를 나와 보면 교회 지정 주차장소에 요즘 건물입주자가 자꾸 차를 주차해 놓습니다.

뻔히 그 시간이면 차가 들어오는 것을 아실 텐데 지난 주도 여러 번 그런 것을 보니 마음 속에 그 분이 참 기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했는 데 머리가 산란하고 그 생각이 자꾸 나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침 오늘 설교를 준비하던 중이였잖습니까?

그래서 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사소하지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구나. 적용을 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뭐 부모의 원수 갚을 그럴 일이야 있겠습니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 대부분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은근히 속상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잖습니까?

그래서 불편한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그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낼 수 있기를 기도하고 나니 곧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한 취업사이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직장인의 63%가 인간관계로 인해 질병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중 30%는 심각한 홧병으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결국 미워할 수 밖에 없는 대상들이 그만큼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내게 어떤 관계이든 우리가 그 분들을 대하는 원칙은 사랑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못을 박으셨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런 사랑을 우리를 통해 보아야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차인0, 신애0 부부를 보세요.

요즘같이 부부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희귀한 때 믿음 안에서 17년을 함께 사랑하며 사는 모습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것을 볼 때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랑이 있는 곳, 사랑이 있는 사람 주변에 항상 사람이 달라 붙습니다.

전도대상자가 많아지는 것이죠.

사람도 자꾸 붙어야지 사람이 자꾸 곁을 떠나는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점점 붙고 세상에서 귀한 것들도 점점 붙고 번성해지는 것이 사랑을 베풀 때 따라오는 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만 선택해서 사귄다면 나중엔 점점 교제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죠.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변덕스러운 죄인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 속에서 뒹굴던 사람들입니다.

과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이런 날 이렇게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왜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죄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를 다시 가지시기 위해 그런 값을 치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많은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사실을 현실로 보고 몸둘 바를 모르고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고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내 죄와 주님의 한없는 용서를 안다면 우리가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요한사도는 16절에 이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고통스럽고 서로 상처를 주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모의 사랑까지 죄에 오염되었기에 참 사랑을 우리가 보고 배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평안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 때만해도 가난한 살림에 자식은 많고 부모들은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는 데 자식을 사랑한들 애정표현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엔 항상 의지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신데렐라 콤플렉스죠.

우리가 마음 속에 열망하길 누군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변하지 않고 나만을 완벽하게 사랑하는 것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본성이 타락하기 이전에 누렸던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런 절대자 하나님의 목숨을 건 사랑을 받아야 만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런 축복 속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그 사랑을 발로 걷어 차버렸습니다.

지금도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또 말씀하지만 죄로 귀가 가리우고 눈이 멀어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말라기 1장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 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마침내 인간의 옷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한 사랑, 상상도 못한 사랑을 경험하면 우리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대면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는 것 이상은 손해보는 것 같아 사랑하기 힘듭니다.

다 계산하고 사랑하잖아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계산하지 않고 한없이 부어지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한 없이 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항상 충만히 차오르도록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누가봐도 사랑이 충만하고 참 보기에도 좋고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지 않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18절은 사랑이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수고와 헌신이 따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평생을 쉬지 않고 뒷바라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수고의 동기가 나오겠습니까?

하기 쉬운 말 만 가지고는 상대방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시간을 내서 사랑해야 하고 몸으로 도와야 하고 물질로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참 재미있는 것이 그 중 한가지만으로 하면 도와주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습니다.

돈만 내면 돈이면 다 되냐고 하고 몸으로 수고하면 몸으로 때운다고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진실함으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겠죠.

사랑의 수고도 진실함이 없으면 그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동기를 주실 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인격과 같으신 사랑의 영이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성령께서는 불쌍한 영혼을 볼 때 움직이십니다.

굶주리며 죽어가는 눈망울을 보고 마음이 감동되면 ARS 누르세요.

성령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볼 때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으로는 절대 나의 이익과 관련되지 없는 대상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못견뎌 하시는 일 중 하나가 긍휼이 없는 매정한 마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 심령이 이런 착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점점 풍성해지길 구하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손을 거두지 말기를 원합니다.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애들러는 진료받으러 온 우울증 환자들에게 이런 처방을 해 준다고 합니다.

“두 주 동안만 나의 처방대로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두 주 동안 나를 잊어버리고 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고 기쁘게 할까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하시고 다시 내게 오십시오.”

환자들은 유명한 박사가 내려줄 특효약을 기대했다 처방 같지 않은 시시한 처방에 실망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의 처방을 따라 실천한 사람들은 우울증이 깨끗이 치료되었다고 보고합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계명을 지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22절입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계명을 지킨 자들은 담대하게 아버지 앞에 나가서 구하고 구한 것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사람들이 다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나 이외에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간구하고 또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더욱 충만해지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또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우리 가족들도 삶에 지치고 실패로 좌절하며 낙망해 있습니다.

측은하게 잠든 모습을 보며 잘해줘야지 생각했다면 깨었을 때 잘해주십시오.

서로 사랑하면 우리 가족들이 힘을 얻고 어려운 환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잘 안되지만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란 명백한 유전자 증거인 사랑의 성도들이 다 되어 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 7.27.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