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다니엘의 세 친구 (다니엘서3장16절-26절)

남수연 2011. 2. 7. 14:00


오늘 본문을 보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명의 주인공들이 신앙의 큰 위기 앞에 서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것을 거절할 것이냐

일제강점기때 신사참배를 두고 위기에 빠졌던 한국교회와 똑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한 중심에 있는 바베론제국의 황제 느브갓네살왕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명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녀들을 어떻게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수없이 믿음의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영적 싸움터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축복된 길을 걸어갈 것인지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천년을 살지 못해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국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참담한 국가의 패망은 이미 예언 된 것이었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며 죄악을 즐기며 살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 보내서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의 풍습을 따르던 그들에게 거룩한 선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불의와 악행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탄하셨겠습니까?

예레미야 5장1절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을 버린 인생이 제 아무리 겉모양을 그럴듯하게 꾸민다 할지라도 결국 불의와 악행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멸망 당하기 백여년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이미 그것이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39:5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말합니다.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바벨론 왕궁에 끌려가 환관이 된 유다지파 왕의 자손들입니다.

본서의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함락시킨 느브갓네살왕이 환관장을 시켜 끌려 온 유대인 귀족 청년들 중 인재를 골라 학문을 가르치고 육성하여 왕을 섬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한 점 오류도 없이 정확히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끌려 온 그들은 포로생활 가운데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을 다스리는 상당한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들에게 오늘 큰 위기가 닥칩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왕은 자신의 권력에 도취되어 높이 2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금 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우고 자신의 위용을 과시합니다.

게다가 이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영을 내립니다.

신상이 돌이 아닌 주물로 만들어진 걸로 보아 쇳물을 녹이는 대형 용광로가 주변에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겠죠.

불복종에 대한 처벌은 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 넣어 화형에 처하는 것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바벨론을 복구하던 중 용광로의 흔적을 발견했고 비석에는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자들을 이곳에 벌하였다는 기록도 발견 된 바 있습니다.

이 거대한 금신상의 낙성식에 왕은 모든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들을 참석하게 했습니다.

각종 악기에 맞춰 금 신상에게 절하는 순서가 되었을 때 모두 땅에 엎드려 왕이 만든 금신상에게 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가운데 절하지도 않고 엎드리지도 않고 믿음을 지키겠다고 우뚝 서있는 이 세 명의 젊은 관리들을 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다 엎드려 있는 무리 중에 당당히 서있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눈에 띄었겠고 얼마나 생경 맞아 보였겠습니까?

만약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별로 생각해보고 싶지 않군요.

오래 전에 누구의 빈소인지 여러 명이 함께 조문을 간 적이 있습니다.

대표자가 향을 피우고 한 줄로 서 있었는 데 어느 순간 좌우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며 바닥에 다 엎드려 있고 저만 혼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들이 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즉시 왕에게 알려지자 평소 그들을 신임했던 왕은 의아해하며 그들에게 다시 한번 절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자 왕에게 한 그들의 답변이 오늘 본문의 16절 부터의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아주 단호하게 나옵니다.

생각의 여지도 없고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용기와 대단한 그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도 좀 더 용기 있게 믿음의 선택을 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현실에 맞게 타협하며 살 것이냐 하는 것이 오늘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내 걸고 믿음을 지킬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미국해외선교센터에서 발표한 글을 보면 최근10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죽은 순교자의 수가 10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계 각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금신상에 절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실 우리 믿음은 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시험대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결국 선택의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쪽이냐, 아니냐.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불신앙의 선택을 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 말씀합니다.

매일 말씀을 내 삶의 푯대로 삼고 말씀대로 선택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축복 된 삶인 줄 믿습니다.

큰 믿음의 결단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높이 치솟은 금 신상을 대적하며 더 높은 신앙을 보인 세 사람의 믿음도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체험과 말씀에 대한 점차 적인 순종에 의해 오늘 하나님을 감동시킨 아름다고 용맹한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15살 전후해서 국가가 사라져버리는 큰 전쟁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결박된 채로 자기 앞에 펼쳐질 두려운 운명에 몸서리치며 이 곳에 끌려 온 사람들입니다.

패전국의 말로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똑바로 체험한 사람들이죠.

열왕기하25장7절에 왕가의 말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유다왕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그리고 그들은 패망의 이유를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헛 된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쳐다보는 일을 절대로 안하리라 다짐했겠죠.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왕궁에서 환관장에게 교육을 받을 때 왕이 내린 음식을 거부합니다.

그 기름진 음식들이 왕의 우상에게 먼저 바쳐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멸망한 자기 나라의 현실을 목도했던 그들은 우상 숭배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금 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제1계명과 2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위기를 모면하고 부끄러운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믿음을 지키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홀로 서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포로 된 자신들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관리로 임명했던 왕의 명령을 거역하며 얼마나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상의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축복해 주셨는지 그들은 이미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순종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을 때 받을 어려움을 감수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축복과 기쁨을 때마다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김동0 목사님이 미국LA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집회 할 때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곳은 작은 교회였지만 그 교회의 성도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말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한 큰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일 성수를 안하고 가게 문을 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죠.

그런데 집사님 한 분이 매상이 좋은 12월 한 달만 주일에 문을 열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하더랍니다.

주일날 문을 닫으면 3천만원 이상의 손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시다라고 하자 낙심하며 그럼 위해서 기도나 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주일 영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후 일어난 LA폭동 때 주위의 모든 가게가 다 불타고 약탈을 당했는데 그 집사님의 가게만 단 한 군데도 손상당하지 않고 물질의 피해도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집사님도 그 이유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당신은 주일 대목에도 문을 열지 않고 주일을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게를 지켜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이야기를 해 주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할 때 하나님이 결과를 책임져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금신상 앞에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매주일 빼먹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하기 어려운 직장상사와 함께 식사할 때 기도를 하고 먹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순간일 수 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누군가 옆에서 나도 기독교인이니 비방을 멈추라고 말해야할 때 일 수 도 있습니다.

정직해선 손해볼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정직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일 수 도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의 말씀대로 선택하며 사시길 축복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등하다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했을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담대해 지고 얼마나 기쁜지 선택에 성공해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타협하고 믿음에 실패했을 때 오는 심리적인 위축과 영적 타격은 결국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는 한국 기독교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는 길을 막고 있다는 자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희생과 손해가 없는 믿음은 고난과 헌신과 사랑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부인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총칼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는 아닐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모습으로 매 순간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번째는 본문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우리도 갖길 원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불의와 맞설 때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하나님이 자신들을 불 속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왕 앞에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라 확신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우리의 기도가 원하던 대로 응답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는 것이 우리가 배우고 싶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겐 다 소망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있고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당연하죠.

그러나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기도하였지만 원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 때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장 코 앞에 벌어진 일이 정말 내게 좋을 일인지 나쁠 일인지 우리가 해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원대로 되지 않은 일이 사실은 우리에게 더 다행한 일이었음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지금은 해석되지 않는 일도 때가 되면 밝혀질 날이 꼭 올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못지않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는 믿음의 메시지는 강력합니다.

6년째 뇌경색으로 쓰러진 사모를 간호하며, 세 자녀의 아빠로, 개척교회 목회자로 꿋꿋이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노원구 공릉동에 다0 림교회를 담임하는 김0 년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서0 연 사모는 셋째 딸을 낳고 삼일 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4달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쓰러진 아내는 말 한마디 못하고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고 눈도 뜨지 못한 채 전신마비가 되어 병상에 누워버립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감은 채 눈꺼플을 껌뻑이며 간신히 의사소통하는 것 뿐입니다.

김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개척교회를 하며 6년을 아내와 세 아이들을 돌보아 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회도 가정도 도저히 감당할 힘이 없어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이 상황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주의 종에게 주신 하나님의 인도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장 교회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내의 병 고침을 위해 수년간 기도하던 김목사는 "낫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매일 새벽 3시 일어나 말씀을 준비 하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면 쉴새 없는 집안일이 시작됩니다.

아침식사 준비와 아이들 등교 준비, 아내를 간병하는 모습을 보며 자녀들은 김 목사에게 '엄빠'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와 가정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막내 딸 윤지가 유치원에서 돌아오자 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마 곁으로 달려가 눈도 뜨지 못하는 엄마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걸 보았습니다.

생후 사흘 만에 엄마가 쓰러졌으니 품에 한번 안겨보지도 못했을 엄마를 어린 것이 애틋하게 사랑하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들어갔을 아들은 능숙하게 설거지를 하고 맏딸 윤영이는 틈나는 대로 엄마 손을 맛사지하며 몸 상태를 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딸의 입에서 아빠가 힘든 데 열심히 해주셔서 고맙고 우리 가족이 이렇게 행복한 것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 전 너무 놀랐습니다.

사춘기 자녀들을 키워봐서 다 알지 않습니까?

불평과 불만을 입에 물고 사는 그 나이에 정말 밝은 얼굴로 가족이 행복해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4달 만에 당한 시련에 누구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아내에 세 아이라니요.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기쁨으로 그 길을 순종하게 되었을 때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육아에 병수발에 목회에 정신없이 달려온 6년 동안 하나님이 일하셨고 지금은 200명의 성도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병석에 누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감겨있는 눈을 꿈뻑이는 것 밖에 없는 아내를 끝까지 사랑으로 돌보는 김목사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실패한 인생을 찾아오셔서 돌보시고 책임져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며 최선을 다하여 역경을 이길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상황 가운데서도 최상의 결과를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때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담대함이 생기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길을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내 계획이 가장 좋으므로 내 계획대로 인도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초조하게 짓누르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의 해결 방법과 결과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이 큰 시험의 결과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담대하게 우상과 맞선 그들의 신앙에 하나님은 놀랍게 응답하십니다.

25절에 보니 그들이 극렬하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졌으나 불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타오르는 불 속에는 단 1초도 늦지 않고 뛰어들어 오셔서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계셨습니다.

화마가 그들을 위협 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순간에도 일일이 보고 계신 주님이 가장 적절한 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말씀 대로 하나님은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리고 오늘 그들의 믿음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십시오.

느브갓네살왕은 28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이방나라의 통치자가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은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불 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수 많은 사람들이 불 속에서 죽음을 당했음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후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11장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편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실 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당장 응답하실지 아니면 그리 아니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응답받지 못해 절망 가운데 허덕일 때도 주님이 모른 채하고 계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6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주님은 그 돌을 막아주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순간에 기쁨에 넘쳐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우리 주님께서 차마 보좌에 앉아 계실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항상 우리를 향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과를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다니엘서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는 모두 쇠퇴하고 멸망해도 하나님이 나라는 영원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근동을 지배했던 위풍당당했던 대 제국 바벨론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느브갓네살왕은 43년간의 통치를 통해 고대 최고의 도시 바벨론을 건설하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만세의 통치자로 영원한 제국을 꿈꿨습니다.

그는 바벨론 성벽을 2중 사중으로 겹겹이 둘러치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안에 장엄한 신전들과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까지 건축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작가들은 이 공중정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습니다.

산악지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외국인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사막 한 가운데 건축한 이 정원은 왕궁의 광장 중앙에 세운 계단식 정원입니다.

높이가 105m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궁정도 신전도 정원도 모두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고증에 의해서만 그 화려했던 영화가 알려질 뿐 제국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굴비 엮이듯 묶여 끌려간 이스라엘은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본토 가나안에 돌려보내시고 나라를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은 아무 것에도 제한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라도 주님만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믿음의 결단을 한 세 사람을 통해 배워야할 것이 있습니다.

현실에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 결과가 실망스럽고 낙심이 되더라도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사랑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껏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전도서 1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저것이 잘 될는지,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 우리 믿음에 자유함이 있고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항상 하나님 편에 서는 믿음으로 살게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