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일화입니다.
설교에서 자주 들었던 본분이죠.
자주 들었지만 우리 삶에 광기를 품은 풍랑이 몰아칠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여전히 두렵습니다.
지금도 나와 내 가정과 사업을 삼킬 것 같은 광풍에 떨고 있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인생의 풍랑의 의미를 음미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맛은 쓰겠죠.
1. 이 장면은 우리 인생의 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걸 보여주는 아름답고 선명한 그림입니다.
우리가 때로 무섭게 일렁이는 바다를 혼자 건너가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내 곁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풍랑을 다스려주실 뿐 아니라 항해의 방향을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22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내 인생을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온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방향타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무래도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속삭이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한번 해 보자.
만일 삶의 선택이 우리에게만 달렸다면 우리 인생엔 더 많은 실패와 환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혹시 내 선택의 잘못으로 큰일 난 것 같은 상황에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타고 계시다면 위태로운 지경일지라도 우리의 배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지나고 나면 주님이 거기에 함께 하셨다는 걸 분명히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배 안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이 그림을 마음에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2. 우리 인생에서 왜 이런 풍랑이 불어닥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은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입니다.
오늘 갈릴리호수의 광풍은 예수님이 일부러 일으키신 게 아닙니다.
갈릴리호수의 지형 특성이 때때로 바다 폭풍 같은 이런 광풍을 일으키던 자연 현상입니다.
우리 인생의 시련은 거의 그런 자연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 광풍에 대해 잘 압니다.
조업을 하다 몇 번이고 마주쳤고, 이겨냈습니다.
이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는 예수님 말씀에 제자들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배를 뒤집어 버리는 광풍이 불 수도 있겠지만 제자들 중 다수는 노련한 어부였잖아요?
그러나 자연현상 같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늘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24절,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경력직 어부로서의 모든 실력을 다 사용했지만 죽게 된 것입니다.
밥 먹듯 그물을 던졌던 그 갈릴리 호수에서 죽게 된 것이죠.
사람이 늘 다니던 길에서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는 것이잖아요?
삶에 활력을 주던 취미생활 중에 사고를 만나기도 합니다.
암전문의의 말에 의하면 우리 몸에 장기가 25개인데, 각 장기마다 20여 가지 암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암의 종류는 5백여 가지가 되는 것이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암전문의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국사람들에게 암진단을 내리면 울고 절망하고 그런 걸 못 봤다고 합니다.
암을 숨기지도 않고 가족과 이웃의 도움을 구한다고 합니다.
다른 질병들처럼 치료하고 관리하며 사는 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누군가 질병의 수가 12,420개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평생 살면서 이걸 어떻게 다 피해 가겠습니까?
부자라고 모든 재난을 막을 핵우산을 마련하지는 못합니다.
건강하다고 12,420개의 질병을 다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이런 풍랑을 만나지만 차이는, 내 배에 누가 타고 있느냐는 것이죠.
내 배에 동승한 어느 탑승자를 의지하고 계십니까?
내 인생 항해에 분명히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꼼짝없이 죽을 것 같은 오늘 상황도 반드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대비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지혜는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항해에 노련한 선장을 모시는 것입니다.
인생 항해에 예수님을 모셔야 안전한 소망의 항구에 다다를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직 나 홀로 항해를 하고 계신 것 같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 내 인생에 오셔서 이생의 환난과 내세의 심판으로부터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주님을 초청하시길 바랍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은 배 안에서 잠드셨고 제자들은 광풍과 사투를 벌입니다.
우리 인생의 두려운 광풍을 만났을 때, 이 장면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큰 환난을 만나 삶이 무너질 것 같을 때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자들처럼 배에 쏟아져 들어온 물을 퍼 내느라 만신창이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내 인생을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덥썩 만난 광풍에서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면, 순풍으로 항해할 때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보통은 내 능력으로 헤쳐갈만 합니다.
제자들은 광풍이 닥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필요한 상황이 오리라고 예상치 못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도 내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래도 내 사업은 내가 더 잘 알지.’
내가 제일 잘 한다면 왜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에서 시련도 오는 것입니다.
자신 있는 일에 더 겸손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신경 쓰이기 시작한 문제는 사실 내 선에서 해결 못하기가 쉽습니다.
점점 더 꼬이고 힘들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고 뭔가 덜컥거린다면 초장부터 기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위험이 예측된다면 당연히 기도로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온다면 더 간절히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4. 제자들도 결국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먼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십니다.
24절,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 열두 명이 사투를 벌이던 일을 아주 쉽게 해결하십니다.
우리가 고전하며 괴로워하는 일도 하나님께는 아무 일거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기도에 항상 그렇게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는 너무 쉬운 일인데도 들어주시지 않아 우리 마음이 상하기도 하죠.
부모가 어린 자식들을 쫒아 다니며 뒤처리를 해 주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기르시지 않으십니다.
신자들의 기도라는 게 대부분 지금 당장 이 일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잖아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즉시 와서 해결해 달라고 보채는 것이죠.
속마음은 이보다 더 합니다.
이 귀찮은 일이 아예 안 생기게 하셔야지 뭐하시는 거냐는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쓰라고 기도를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시련과 기도는 둘 다 우리를 온전하게 연단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 장성해지도록 단기간, 혹은 장기간 시련과 기도 속에서 연단 하십니다.
마음을 단련시키시기 위해 기대와 실망을 수없이 반복하게도 하십니다.
시련이라는 풍랑은 깊은 것을 뒤집어 밖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두려운 마음, 죽을 것 같은 공포심, 망할 것 같은 걱정들이 엄습합니다.
한마디로 내게 믿음이 없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왜 너희 힘으로 광풍을 상대했냐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바로 전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는 못한 것입니다.
나를 부르셔서 죽도록 버려두시는 무책임한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25절,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시련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공로는 내 죄와 약점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드러나야 예수님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광풍을 통해 나에 대해 한가지라도 더 알게 되었다면 그래서 고난이 유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고치시고, 마침내 그 시련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순식간에 고요해진 갈릴리 호수를 보며 제자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25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만물의 창조주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자신의 세계를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21세기 과학이 무섭게 발전하지만 창조세계를 인간 뜻대로 조작하진 못합니다.
창조세계의 원리를 발견해서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과학자들 몇 명이 우주와 과학에 대해 토론하는 유튜브 채널을 제가 가끔 봅니다.
한 영상에서 우주 행성 중에 물이 있냐는 문제를 두고 대화를 하더군요.
생명체가 살려면 반드시 액체 상태의 물이 필요하죠.
우주에 수소도 있고 산소도 있는 데 왜 지구에서만 그것들이 화합해서 물이 되었는지가 과학의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물이 있다 해도 어디서 생명체가 왔냐는 것입니다.
우주 먼지를 타고 오지 않았냐는 등의 온갖 가설이 난무하지만 결국 모른다는 것이죠.
어렵게 과학의 근거를 제시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는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과학의 탐구가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학 현상과 공식은 몰라도 왜 일어났는지 답은 압니다.
인간이 자신의 두뇌를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 정체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인식했다면 ‘그가 누구이기에 이런 일까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겠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했다 해도,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내려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그때까지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누구라고 알고 계십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되셔서 내 죄를 대신 속죄해 주신 나의 구원자이심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25년3월5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수요기도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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